'30년 고문'이라는 노 대통령의 몽상

[김욱 칼럼] 퇴임한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일까

등록 2006.08.28 10:54수정 2006.08.30 15:3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후 꿈은 무엇일까? 평소의 소망을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지난 6월 보도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꿈은 "고향에서 살며 생태계 보전과 청소년 수련 운동"을 하는 것이다.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이 훌륭한 계획을 세워 놨으면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생태계 연구와 청소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공부를 하면 좋을 텐데 웬 부질없는 퇴임 후 걱정이 그렇게도 많을까?

노 대통령은 20일 여당 지도부와의 청와대 오찬 때 집념어린 말을 했다. "임기가 끝나면 당에 가서 고문을 하고 싶다"며 "제가 죽을 때까지 30년 더 살 텐데 열린우리당과 함께 가다 눈을 감고 싶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또 "한국 역사 최초로, 정부에 참여했던 인적 자원을 데리고 함께 당에 가서 중심이든 주변이든 역할을 하고 싶다, 당이 '포말 정당'이 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여간 궁금해지는 게 아니다. 당에서 고문으로 일하며 '중심이든 주변이든' 역할을 하려면 굳이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에 귀향해 살 필요가 있을까? 사실 그보다 더 궁금해지는 건 퇴임한 대통령의 그 '역할'이란 게 도대체 뭐냐는 것이다.

지금 '바다 이야기' 때문에 노 대통령의 '퇴임 후 이야기'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 우리 정치의 구도에 관한 문제니만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실패를 거듭해온 책략들

노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지역문제 해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1차 책략은 2004년 총선이었다. 노 대통령은 민주당의 법통을 끊는 것으로 영남인들에게 호소하여 영남의석을 다수 얻음으로써 한나라당 퇴출의 기반을 닦고 지역문제를 일거에 해소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래서 제2차 책략으로 2005년 이른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 나온다. '중대선거구제 개편-내각제(이원정부제)식 운영-개헌'이라는 대연정 복안은 사실 많은 이들이 잊고 있었겠지만 2002년 10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나왔던 것이다.

어쨌든 이 책략은 의회 과반이 무너진 2005년 7월에 공개적으로 제안됐지만 주지하듯이 한나라당에 의해 일언지하에 거부됐다. 즉 선거구제를 개편해 지역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도 실패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주목할 사실이 있다. 노대통령은 당시 "만일 대연정 문제에 반감을 가진 의원이, 예를 들어 호남의 어떤 의원이 당을 떠나겠다고 할 경우 내가 먼저 당을 떠나겠다"고 말해 탈당까지 언급한 대목이다. 대통령 권력이야 '정치적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그때는 왜 열린우리당 당적에 집착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앞으로 "30년 더 살 텐데"라는 생각을 못했단 말인가?

간단하다. 우선은 자신의 확신대로 대연정으로 선거구제가 바뀌어 지역문제가 일거에 해결된다고 가정하면 자신이 굳이 당적을 유지하며 정치에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할 절박함이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는 대연정이 개헌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중대선거구제나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바뀔 경우의 정치상황이다. 이 경우 현실적으로 여전히 호남지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열린우리당보다 노 대통령 자신의 이념에 더 투철한, 가능성 있는 작은 신당이 더 필요하다고 봤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신선거구제 하의 다당제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열린우리당 당적에 굳이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이제 세번째 책략이 나오고 있다. 세번째 책략은 5·31 지방선거에서 공룡이 된 한나라당을 보고 난 이후 나온다. 노 대통령은 이제 선거구제 개편이나 개헌 등으로 판을 흔들어 지역문제를 자신의 임기 중에 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에너지는 없다고 현실을 인정한 듯 하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번째 책략은 현 구도 하에서 열린우리당을 통해 자신의 '창당초심'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것이다. 앞으로 30년 동안!

노 대통령의 생각에 자신의 임기 중에 지역문제를 일거에 변화시키는 것이 실패한 이상 이제 죽을 때까지 열린우리당에 고문으로 터 잡고 앉아 이 문제와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는 듯 하다. 단 이제 거꾸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가고 싶으면 나가야 한다.

노 대통령만 볼 수 없는 현실 이야기

그렇다면 노 대통령에게 현실을 얘기해줄 수밖에 없다. 나만이 볼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노 대통령만이 볼 수 없는 현실 이야기다.

굳이 번잡하게 여러 나라의 정치권력 현실을 돌아볼 필요도 없다. 우리의 지난 몇 십 년 역사만 돌아봐도 충분하다. 권력은 권좌에서 물러나는 바로 그 순간 끝이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권좌에 앉아 있는 채 부분적으로 이양되기도 한다. 이른바 레임덕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27일 "당이 정권을 잡는데 필수적인 조건이라면 (비판을) 감당할 수도 있다"는 노 대통령의 말에 대해 "노 대통령은 자신이 대선후보였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거부했듯이 차별화가 선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 "그러나 대통령의 지지도가 떨어져서 당이 판단하기에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나 유사 이래 세계 어느 나라나 정치판은 정글이다. 노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안 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설령 그랬다 해도 그것은 노 대통령이 특별한 품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이 도움이 됐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앞으로 열린우리당의 대선 주자들도 노 대통령이 도움이 되면 계승 운운할 것이고 아니면 가차 없이 탈당까지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직면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은 지금부터 "날 공격해도 좋으니까 모두 함께 당 깨지 말고 잘해 보자"는 메시지를 계속 건네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당적을 갖고 하고 싶은 '열린우리당 고문으로서의 30년 역할'이란 것도 현실적인 권력에 이런 저런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얘기를 해보자.

노 대통령의 '창당초심' 즉 '꼬마민주당의 양비론=영남개혁 세력의 양비론' 이데올로기는 지난 민주화 역사에서 나름대로 충분히 정치적 지분을 행사해 왔다. 집권까지 했다. 그런데 그 이데올로기로 지역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것은 분명히 실패했다. 그렇다면 '30년 고문' 얘기로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왜 실패했는지, 그 참담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간단하게 말하자. 양비론 이데올로기가 실패한 이유는 자신들이 현실적으로 대표하는 유권자들의 세력을 턱 없이 과대평가하여 양비론만으로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호남이 없어야 개혁이 가능하다고 공격적으로 몽상했기 때문이다.

좋다. 원한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은 자유다. 다만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맞다면 특정 정치집단이 얼마만큼의 유권자들을 대변하는 힘을 가져야 하는지를 냉혹하게 계산해 재분배해줄 것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맞다면!

그런데 이 전언은 또 무슨 날벼락인가? 27일자 <연합뉴스> 보도를 보면 노 대통령은 "정치가 제대로 된다면 양대산맥이 계속 유지돼 가야 한다"고 했다. 양대산맥? 현재 열린우리당 지지율과 의석 점유율 간의 불균형이 얼마나 크든 열린우리당을 무조건 하나의 산맥으로 간주하는 것이 "정치가 제대로"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좋다. 그렇다 치자. 나머지 하나의 산맥은 어디인가?

난 노 대통령이 설마 "우리 정치가 제대로 된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라는 양대산맥이 계속 유지돼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당? 아니면 민주노동당? 이 당들은 현재로서는 "계속 유지돼 가야" 할 '산맥'은 아니지 않는가?

이제는 양비론 마저 포기하나

만약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염두에 두고 그런 발언을 했다면 이제 대연정 제안 이후 '양비론 이데올로기'도 완전히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민주당이 호남에 의존한다고 '아니요'라고 했으면서 영남에 의존하는 한나라당은 인정한다면 그것은 양비론이 아닌 '영패 투항주의'다.

그리고 노 대통령이 결국 한나라당으로 현현하는 영패 투항주의자라면 앞으로 30년 동안 열린우리당 고문을 해서 얻어야 할 정치 진화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리하자. 지금 노 대통령은 퇴임 후 걱정이 아니라도 할 일이 태산이다. '외부선장'이니 뭐니 하며 정권 재창출에 관여하겠다는 생각도 부질없고, 창당초심 이데올로기를 성공시키겠다고 '30년 고문'을 원하는 것도 부질없다. 전임자들도 모두들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믿은 사람들이었다. 누군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었겠는가?

이제 앞으로 정치구도는 노 대통령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굴러갈 것이다. 충분히 봐 왔지 않은가? 쓸데없는 힘 빼며 무리하지 말고 정치구도는 굴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라. 노 대통령은 그저 남은 1년 반의 임기나마 혼신의 힘으로 국민을 바라보며 청와대 일에만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퇴임하면 공언한대로 그냥 고향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내기 바란다. 어지러운 세상에 비하면 소박한 청원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2. 2 한동훈 표정 묻자 "해가 져서...", 이어진 기자들의 탄성 한동훈 표정 묻자 "해가 져서...", 이어진 기자들의 탄성
  3. 3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4. 4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5. 5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