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61회 광복절 경축식에서 "미국과의 FTA는 또 하나의 도전"이라며 한미FTA 계속 추진할 뜻을 분명히했다.연합뉴스 백승렬
임기 후반기 회심의 카드로 꺼내든 한미FTA(자유무역협정)가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을 추락시키고 있다. 여기서 '추락'은 10%대에 근접한 대통령 지지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와 맞물려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으로 이제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착각'에 불과함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노무현 대통령의 너무나도 일방적인 충격 선언으로 시작된 한미FTA를 둘러싼 논쟁은 대체로 한미FTA의 경제적 효과를 중심으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왔으나 정책 추진 과정의 심각한 비민주성은 정면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한미FTA 추진 과정을 통해 노무현 정부의 민주주의가 어떤 중병을 앓고 있는지, 민주적 정당성 관점으로 점검해 본다.
위임된 권력 넘어서면 저항권 발동할 수밖에
대의민주주의란 오직 국민들의 의사를 통해서만 형성되는 '권력'을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일시적으로 '위임'하는 정치이지, 선출된 대표자가 위임된 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양도'의 정치가 아니다. 2002년 대선에서 당시 진보적인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국민들의 동의와 탄핵 국면에서 대통령을 구출한 국민적 지지의 의미는 무엇인가?
87년 민주화 이후 지지부진한 민주정부들의 실패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라는 국민들의 염원이 아니었던가? 즉 국민들의 민주적 의사를 반영하여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수행하라는 국민들의 권력 '위임' 행위 이상의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제시된 바도 없고 이후 국정 운영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고려된 바도 없는 한미FTA를 자의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물론 조약의 체결·비준 권한은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권한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헌법에만 근거하여 국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한미FTA 추진의 정당성을 강변한다면, 이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매우 일천한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모든 종류의 국제 조약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한미FTA는 이제까지의 어떠한 국제조약과 비교해 보아도 규모와 질적인 내용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지적해 왔듯이, 한미FTA 체결은 이제까지의 한국 경제의 운영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길을 예고한다.
민주공화국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국가정책은 필수적으로 민주적 안전장치가 요청된다. 그러나 현재 대통령 훈령에는 이러한 안전장치가 사실상 부재하거나 수단화되어 있다. 2004년 6월 8일 대통령훈령 121호로 제정된 '자유무역협정체결절차규정'에는 국회의 실질적인 통제도, 국민들의 참여도, 이해당사자의 권리도 사실상 실종되어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 사상가들의 복잡한 논의에 굳이 의존하지 않고 17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의 원리로만 보아도 노무현 대통령의 행태는 민주적 정당성의 기초에 해당하는 '위임된 권력'의 한계를 명백히 벗어난 행위이다.
한미FTA와 같이 중요한 국가정책은 최소한 대선이나 총선과정에서 국민들의 검증을 받아 권력을 위임 받은 정권이 추진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적 대의민주주의 원리로 보았을 경우에도 타당하다.
따라서 한미FTA 추진은 현재 시점에서 당연히 중단되어야 하며, 굳이 추진하고자 한다면 차기 대선이나 총선에서 공약으로 내세워 국민적 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만약 노무현 정권이 위임된 권력의 한계를 넘어 한미FTA를 계속 추진한다면, 고전적 자유주의자인 로크(John Locke)의 처방대로 국민들은 민주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저항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시되고 있는 권력분립의 원리
통상절차에 대한 현행 대통령훈령과 통상절차법안의 차이 비교 | | | 대통령훈령 121호 | 통상절차법안 | 추진기관 | - 외교통상부 산하 자유무역협정추진위원회 - 위원장: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 - 국무총리 산하 통상위원회 - 위원장: 국무총리 | 비준동의안 | - 자유무역협정의 협상 종결 이후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요청 | - 조약을 추진하는 단계에서부터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 - 조약추진동의 단계에서 국회는 특정조약추진계획의 변경을 요구하거나 협상 추진방향, 조약의 범위 등에 대해 조건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함 - 국회는 협상 종료 후 조약안이 문제가 있는 경우 정부로 하여금 재협상 할 것을 요청할 수 있음 | 협상진행상황 보고 | - 협상의 중요 진행상황을 국회에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그 범위와 내용, 시기 등의 내용이 명기되어 있지 않음 | - 협상의 진행상황을 국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하고, 즉시 보고할 사항 등을 명확히 규정 | 정보공개 | - 정보공개에 대한 특별한 규정 없음 | - 통상협상 및 통상조약에 관한 정보를 국민 및 이해당사자 등에게 신속?투명하게 공개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공개할 수 없는 사유를 엄격히 제한 | 국민의 권리 | - 형식적인 공청회 정도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규정 | - 국민 또는 이해당사자 등이 정부 또는 국회에 대해 통상조약정책에 관한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고 정부 또는 국회는 검토 결과를 통지하도록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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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추진 과정에서는 권력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일반적 명제도 가볍게 무시되고 있다. 행정부-입법부-사법부로 구성되는 국가기관 간의 권력분립의 원리는 절대 권력의 부정과 부패, 자의적 권력 행사를 막기 위해 역사적으로 고안된 민주주의 발전 과정의 산물이다.
현재 노무현 정권의 한미FTA 추진은 근·현대 민주주의가 발전시켜온 권력분립의 원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현재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회의 권한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국가 간 조약은 일종의 입법행위이기 때문에 입법부의 권한이 되어야 함에도, 국제관계의 특성상 헌법에 이를 대통령의 권한으로 규정하고 대신 국회가 동의권을 행사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헌법 조문에 명기된 국회의 동의권은 협상 결과에 대한 사후적인 동의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협상 개시, 협상 과정에 대한 국회의 충분한 감시와 평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반면 노무현 정권은 헌법을 매우 기계적으로 이해하여 국회가 순수하게 사후적 동의권만을 가진 것으로 치부하고 FTA 체결 절차를 대통령훈령으로 처리하고 있다. 지난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일방적인 한미FTA 개시 선언이 있기까지 국회는 이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또한 협상 과정에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등 헌법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따라서 사실상의 입법행위인 조약의 체결 절차에 대한 법 규정이 미비한 상황에서 지난 2월 권영길 의원이 대표 발의한 '통상협정의 체결절차에 관한 법률안'(이하 통상절차법안)의 조속한 제정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통상에 대한 권한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주장만을 반복하고 있으며, 정작 국민들이 부여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해야 할 국회는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다. 통상절차법안은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고, 늑장을 부리다가 구성된 국회 한미FTA 특별위원회는 사실상 한미FTA 지원위원회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정부는 스스로 정해놓은 절차적 규칙도 지키지 않아
노무현 정부가 스스로 정해놓은 '자유무역협정체결절차규정'에 따르면, 정부는 FTA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공청회를 마련하여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FTA 정책 수립에 반영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이 스스로 정해놓은 규칙은 과연 준수했는가?
한미FTA와 관련된 최초의 공청회는 2월 2일에 진행되었고, 협상 개시 선언은 2월 3일 새벽에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정책 결정 과정에서 'A→B→C'의 절차적 과정을 정해 놓는 이유는, A에서 논의된 결과가 B의 내용을 변경시키고, B에서 다시 숙고된 결과가 C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C는 언제나 A와 B의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다. 공청회(A), 대외경제장관회의(B), 한미FTA 협상 개시 발표(C)라는 일련의 과정들은 상당히 긴 숙고와 피드백의 과정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1~2일 안에 시행되도록 급조되었다. 따라서 한미FTA 협상 개시와 이후 일정을 다 정해놓은 상황에서 진행된 공청회는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
정부는 공청회를 개최했으니 대통령훈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단 몇 시간 차이로 공청회와 협상 개시 선언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이를 FTA 정책 수립에 반영해야 한다는 대통령훈령의 절차적 규칙은 전혀 지켜진 것이 아니다. 이는 정부가 자신이 제정한 훈령을 스스로 어긴 자기부정의 사례일 뿐이다.
이로부터 참여정부가 자랑스럽게 내세운 참여정치가 그들의 본질적 속성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기제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차적인 영역에서 시민단체의 참여를 제도화시킴으로써 참여정부라는 외양을 갖추고, 한미FTA와 같은 본질적인 영역에서는 국민들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가급적 민주적인 외양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획득된 참여정부라는 외양을 통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려는 것,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좌파 신자유주의'의 참모습인 것이다.
'조작'과 '선동'으로 추진된 정책은 원천 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