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고향에 관한 그리움

[서평] 박완서의 기억 속 사진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록 2006.08.03 14:10수정 2006.08.0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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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뭔가. 소설인가. 수필인가. 책을 넘기다 보면 기존 장르에 관한 인식을 깨뜨리는 작품인 듯하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서도 마치 수필을 읽는 느낌이다. 수필을 읽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르다.

처음엔 장르를 가늠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존재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다. 저자 박완서가 기억에만 의존해서 쓴 장편소설이다. '기억은 각자의 상상력'이란 저자의 말을 참고하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2004년쯤인가, 매스컴에서 자주 소개했던 책으로 당시엔 구비만 해놓았다. 요즘처럼 한가해지면 읽기 위해서였다. 이제야 내용을 겨우 파악했다. 넓은 운동장을 샅샅이 확인하면서 걷는 자유로움 속에 지각생의 설움을 모두 묻어버릴 수 있다는 심정에서는 기쁘기도 하다. 때로는 동전이나 한 번도 쓰지 않은 듯한 깨끗한 만년필까지 주울 경우에는 감정이 완전 역전 아니던가.

나처럼 때늦은 독자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차례를 간략히 소개한다. 앞부분의 '다시 책머리에, 작가의 말'과 끝에 '작품 해설'을 제외한 본문의 장만을 나열해본다. ▲야성의 시기 ▲아득한 서울 ▲문밖에서 ▲동무 없는 아이 ▲괴불마당 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오빠와 엄마 ▲고향의 봄 ▲패대기쳐진 문패 ▲암중모색 ▲찬란한 예감 등 12개의 장이다. 각 장의 의미라도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항상 읽을 때마다 거치는 작업순서다. 어떻게 읽을까. 어느 부분부터 궁금해해야 할까. 마침내 결정했다. '싱아'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독서의 끈을 잡아나가기로.

"싱아는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높이는 1미터 정도로 줄기가 곧으며, 6∼8월에 흰 꽃이 핀다. 산기슭에서 흔히 자라고 어린잎과 줄기를 생으로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나 예전에는 시골아이들이 즐겨 먹었다." (표지 뒷면)

표지 뒷면 중단에 그림과 함께 아주 작은 글씨로 씌어있는 말이다. 싱아의 정체가 과연 뭘까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빈궁기를 떠올리는 매개체임을 알 수 있었다. 작가에게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요소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먹거리가 절대부족해서 그것마저 먹지 않을 수 없던 궁핍기를 암시하는 매개물 말이다. 자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하 <싱아>)는 '유년시절에의 향수, 즉 저자의 어린 시절 고향에 관한 그리움'이 될 것이다.

나는 독자로서 <싱아>를 읽으며 세 단계의 충격적인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무엇일까'가 첫 단계이다. 독특한 소설 형식이란 점에서 피할 수 없는 느낌이다. '진짜 아리송한 장르다'가 두 번째 단계이다. 여전히 읽기의 뚜렷한 노선을 찾지 못하고 중반을 지나가고 있을 때까지의 느낌이다.


다음은 '역시 소설이군'이 세 번째로 느끼는 단계이다. 특히 '찬란한 예감'이란 제12장을 읽을 때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대개의 다른 장보다 양적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묘사능력이 빛을 발휘하고 있음을 인식한 뒤에는 작품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다. 다음에서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정말로 그들에겐 징그러운 벌레를 가지고도 오락거리를 삼을 수 있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 생각은 안 했다. 나는 내가 너무 귀족적으로 자란 걸 원망했다. 잘 먹고 잘 입고 떠받들어졌다는 소리가 아니라 수모에 길들여질 기회 없이 커 왔다는 뜻이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순간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만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124쪽-125쪽)


아마도 작가가 참아왔던 할 얘기가 봇물 터지듯이 나온 듯하다. 급기야는 절제하고 속편을 기대하게까지 하니 참으로 놀랍다. 독자로서는 좋았다가만 경우를 경험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벌레 취급당했던 시절 얘기를 짤막하게 운만 띄워놓은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작품에서 보이겠노라고, 독자로 하여금 기대하게 하는 의도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 : 유년의 기억'이란 부제에서 드러나듯 <싱아>는 미완의 소설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겨우 유년의 시절을 마쳤을 뿐이다.

제1장 '야성의 시기'부터 마지막 제12장 '찬란한 예감'(고약한 우연에 관한 정당한 복수의 시간과 벌레의 시간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 같은 느낌)까지는 결국 작가가 유년을 지나 대학생이 된 때까지였다. 중년의 기억·노년의 기억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직 남아 있다. 어느 시점엔가 채워 넣기를 시도할 것 같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일제시기와 한국전쟁 발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음 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불과 5년만에 혼란정국은 남북전쟁을 맞이한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전쟁을 맞이한 것이다.

이때 저자의 나이 20세 정도이다. '친일', '좌익', '우익으로의 전향' 등이 저자 집안에 많은 파란을 일으킨다. 저자와 저자의 가족 거의가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숙부가 사형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한편 진정 하고픈 얘기를 시작하기 전 단계까지 와서는 이야기를 맺고 만다. 이제 저자는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할 시간만 남아 있다.

우리는 글을 쓰게 되는 동기를 크게 둘로 구분하곤 한다. 표현 동기와 전달 동기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 전체 글을 써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도 문제와 비중 문제는 늘 존재한다.

표현 동기가 우세해져서 글을 쓰게 되면 저자의 지나친 감정발산으로 독자가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관을 지나치게 노출해버린다. 운문이 주요 부류의 글이 되기 쉽다. 객관성을 잃기가 쉽다는 이야기다.

반면, 전달 동기에 따라 글을 쓰게 되는 경우에는 저자가 독자에게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싱아>는 자연 표현 동기보다는 전달 동기가 우세한 작품이다.

작가는 침착성을 거의 잃지 않고 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무슨 내용을 어느 시기에 어떤 순서로 내놓아야 할지도 알고 있다. 감정을 절제하면서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싱아>의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내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본다. 대내적으로는 주로 '저자와 저자 어머니 이이야기'와 '저자와 저자 오빠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제1장 '야성의 시기'에서 제11장까지와 제12장 둘로 나눌 수 있다. 변별기준은 일제침략과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것이다. 나는 이것 후자를 선택하고자 한다.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저자의 다음 말은 한편으로 나의 생각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한다.

"종전과는 좀 다른 방법으로 글짓기를 해 봤다고 해서 소설 기법에 어떤 변화의 계기를 삼아 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가가 자화상 한두 장쯤 그려보고 싶은 심정 정도로 썼다. 여태껏 내가 창조한 수많은 인물 중 어느 하나도 내가 드러나지 않은 이가 없건만 새삼스럽게 이게 바로 나올시다, 라고 턱 쳐들고 전면으로 나서려니까 무엇보다도 자기미화의 욕구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데 비견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게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기회를 꼭 가지려는 의도가 아닐까. 주위사람에게 벌레로 취급당하던 시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때를 갖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벌레의 이야기를 변명할 수 있는 자리마련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벌레의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바로 과거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자, 한 인간의 개인사가 거듭날 수 있는 기회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인간은 누구나 어두웠든 찬란했든 자신만의 과거를 지닌다. 특히 묵혀두었던 자신의 과거를 오늘에 되새겨보고 더 나은 나로 도약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장한다.

덧붙이는 글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닷컴, 2003. 값7천원)

덧붙이는 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닷컴, 2003. 값7천원)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박완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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