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쟉크 교회최미숙
프랑스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은 (8차례의 종교 전쟁을 포함해서) 16세기 내내 일어났다. 캘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의 지도로 16세기 중반에는 약 200만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있었다. 가톨릭과 그를 후원하는 왕권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1562년이었다.
3년간의 종교 전쟁이 끝난 뒤, 샤를 9세와 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는 새로운 화해의 방법으로 프로테스탄트 지역인 나바르 왕국(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동북부)의 왕자, 앙리 드 나바르(앙리 4세)와 마그리뜨 드 발루아(마고 여왕)의 결혼을 주선한다.
교황과 가톨릭 극단주의자들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1572년 8월 18일 앙리 드 나바르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마그리뜨 드 발루와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6일 뒤인 1572년 8월 23일 자정, 파리의 생-제르맹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생-바르텔레미 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다른 것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태도가 권력과 결합하면서 빚어낸 참극이었다. 영화 <여왕 마고>는 이 시기를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앙리 드 나바르는 왕이 되고 난 뒤 프로테스탄트의 수장 역할을 철저히 했다. 그는 1598년에 프로테스탄트들의 종교적 권리를 결국 획득했고, 약 60여개의 '안전 지대'를 확보했다. 몽토방은 프로테스탄트들의 가장 중요한 안전 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