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굽은 할아버지의 때를 밀어 드렸습니다

작은 나눔은 결국 본인의 기쁨이 됩니다

등록 2006.05.20 11:24수정 2006.05.2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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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삼십 년 동안 테니스를 해왔다. '아내'처럼 동고동락해 온 셈이다.


오늘도 오후 늦게까지 테니스를 하고 몇몇 동호인들과 단골 목욕탕으로 갔다. 목욕탕이 좀 옛날 식이라 여느 날처럼 썰렁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열심히 몸을 씻고 계셨다. 드문 일이었다. 팔순은 쉬이 넘긴 듯, 깡마른 체구는 언뜻 보기에도 병약해 보였다. 보호해 줄 사람도 옆에 없었다. 그 분은 등을 구부린 채 연신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바가지에 물을 퍼 갈 때는 내 두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나는 반신욕을 하느라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온도가 낮아 생각만큼 땀이 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참아야만 했다. 기름 값 인상으로 보일러를 일찍 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여전히 그 분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저러시다 기운 다 빠지시겠네. 몸에 때가 좀 남아 있으면 어때. 때가 피부를 보호해 줄 수도 있다던데. 거동하기조차 힘든 분이 집에 갈 기운은 남겨 두셔야지. 가는 도중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주머니 사정으로 오랜만에 목욕탕에 오셨는가. 정갈한 분이라서, 가까이 온 그 운명의 날을 대비하시려는가. 그렇잖으면 공수래공수거, 묵은 때까지 버리실 참인가.

이런 염려와 엉뚱한 비약을 하면서 나는 지루함을 참아내고 있었다. 충분히 땀을 뺀 후 탕 밖으로 나왔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몇 가지 동작을 이어가던 중 할아버지의 굽은 등에 내 눈이 찔렸다.


이런 곳에서 노인을 대할 땐 좀 안쓰러웠다. 여태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 할아버지 등 뒤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등 밀어 드릴게요."
"넘 미안하네, 고마와."

좀 의외인 듯, 그러면서 반겼다. 볼이 쏙 파여 치아도 거의 다 빠진 듯했다.


"괜찮습니다. 쓱쓱 밀어 드릴게요."
"그래, 고맙고 미안해."

가까이에서 보니 할아버지의 등은 더 작았다. 두어 뼘밖에 안 되었다. 피부는 윤기를 잃었다. 나도 늙으면 이렇게 볼품없이 초라해질까. 아니 운동으로 다져 온 몸인데 하고 넘겨 버렸다.

조심스레 힘을 주며 때를 밀었다. 피부와 살이 따로 움직였다. 볼이 쏙 들어간 얼굴로 돌아보며 "물에 마니 부라 놔서, 마니 나오제?" 하신다. 뭉친 때는 제법 우수수 떨어졌다. 끝으로 그 까칠한 등을 비누칠로 헹궜다. 가려움이 산뜻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이제 그만 씻으세요."
"고마와."

할아버지는 쪼글쪼글한 볼에 미소를 담고 있었다. 덩달아 내 몸의 때도 말끔히 벗긴 것 같았다.

"착한 짓 했네."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도 흐뭇해 했다. 오늘은 테니스코트에서도 목욕탕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냉탕에서 그 흐뭇한 열기를 식혔다. 여전히 할아버지는 그 녹색 타올로 때를 밀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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