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도시락을 먹어보셨나요?

눈물젖은 도시락에 얽힌 유년시절의 회상기

등록 2006.04.26 22:02수정 2006.04.2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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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던가? 삶의 쓴 맛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세간의 속설(俗說)입니다.


하지만 저는 '눈물 젖은 빵' 대신에 '눈물 젖은 도시락'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청운(靑雲)의 꿈이 영글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 삶의 길을 바로 잡아 준 '눈물 젖은 도시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금도 가끔씩 비몽간에 다가와 눈망울 가득히 맺힌 이슬을 담아가는 가슴 아린 도시락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한때 우리에게는 태산보다도 넘기 힘들다는 보리고개(餓嶺)가 있었습니다. 1945년,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다시 배고픔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설상가상 내가 살던 농촌지역에는 60년대 말부터 3년 동안이나 비 한 방울 비쳐보지 않는 극심한 한발(旱魃)로 논밭은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농작물은 뿌리까지 타들어 갔습니다.

수리시설이 열악한데다 물을 끌어 올릴 양수기나 모터를 돌릴 전기마저 전무한 상황에서 하늘만 바라보아야 하는 농민들의 가슴도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먹거나 쑥부쟁이 같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겨우겨우 연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난 해 수확을 해서 저장해 두었던 쌀은 떨어지고 보리를 수확하기에는 아직 일러 먹을 것이 없었던 즉 요즘 같은 시기를 우리는 보리 고개라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서민들의 고통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설움도 설움이려니와 가난한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자녀들의 학자금 마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등골이 휘어지게 일을 해도 먹거리 해결이 어려운 판이어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낸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중, 고등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조차도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국민학교(초등학교)마저 의무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만 있었을 뿐 실제는 가계(家計)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천원도(당시의 화폐) 안 되는 기성회비(나중에 육성회비로 명칭이 바뀌었음)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심심찮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루는 기성회비 미납이라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 집으로 쫓겨 간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여러 날에 걸쳐 종례시간마다 독촉을 하셨던 후인지라 선생님 얼굴 뵐 면목이 없기도 했지만 우리 집안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에 수업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어린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습니다.

더구나 다음날, 해가 뜨는 것이 저에겐 무지무지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집으로 쫓겨 가는 마당에 선생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빈손으로 또 등교를 한다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지금은 돈이 없으니 훗날에 꼭 주겠다' 했다고 말씀을 드리라며 당신 일에만 몰두하고 계시는 아버지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습니다. 벌써부터 머리 속에는 선생님의 화난 눈빛과 함께 종아리에 쫙쫙 내리 뻗는 피멍자국이 아른거리고 있었습니다.


지각에 따른 체벌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어이 돈을 받아가야겠다는 심산으로 떼를 써 봅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당신 일에만 열중하시는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억지를 부리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돼지우리를 깨끗이 청소하셨던 아버지께서 밭에 거름으로 뿌리기 위해 돼지똥을 바지게에 가득 짊어 놓으셨는데 실랑이를 하다가 그만 땅바닥에 모두 쏟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버지께서는 작대기를 들어 나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쪽을 향해 쫓겨 가면서도 차라리 붙잡혀서 죽도록 맞고 싶은 심정이었을 정도였습니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도착한 학교는 아침조회가 시작되었음인지 쥐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순간, 앞으로 닥쳐올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굳게 닫친 교실문을 소리나지 않게 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보지만 허술한 문은 그만 천둥소리를 내고 맙니다.

움찔하며 고개를 살며시 내미는 순간 나를 기다리는 것은 예상했던 것처럼 반 친구들의 두려움에 찬 걱정스런 표정과 선생님의 화난 얼굴이었습니다. 이내 얼굴에 땟국물이 좔좔 흐르는 모습으로 선생님 앞으로 불려간 나는 당연히 뒤이어지는 회초리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아니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군대 내무반 점호시간에 매를 맞고 난 후에서야 하루 저녁 마음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었던 신병의 그런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종아리를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회초리 자국을 보면서 제 설움에 겨워 서럽게 울먹이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반장이 찾아와 학교 밖 울타리 밑에서 어떤 아줌마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 모르게 드나들면서 생긴 좁은 개구멍 사이로 작은 체구의 어머니가 학교 안을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이내 모자간의 애틋한 상봉이 이루어지고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니께서 내미는 것은 도시락이었습니다. 따뜻한 밥을 지어 행여 식을세라 집에서부터 가슴에 품고 왔던 도시락입니다. 당신의 거친 손을 내밀어 눈물자국을 닦아주시던 어머니께서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으셨던지 아들의 얼굴을 몇 번 만져주시다가는 몸을 돌려 흐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침에 쫓겨 오느라 도시락도 가져가지 못한 아들이 점심을 굶게 될까봐 다시 따뜻한 밥을 짓고 그리고 그 도시락이 식을세라 당신의 가슴에 품고 십리도 더 떨어진 학교까지 점심시간을 맞추기 위해 한 달음에 달려 오셨던 것입니다. 점심시간, 책상 위에 올려진 도시락에는 어머니의 정성이 한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찌그러진 도시락 뚜껑에는 수없이 많은 눈물의 흔적들도 흩어져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싸시면서 아들의 처지가 안타깝게 여겨 흘리신 어머니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도시락은 근래 몇 년 사이에는 볼 수 없었을 만큼 최고였습니다. 뚜껑을 열자, 장날이면 돈을 사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숨겨두었던 그 귀한 달걀로 만든 계란말이가 나를 반기고 있었지만 나는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나는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처럼 계란말이를 먹을 수 있다는 행복감에서였는지 아니면 많은 고통이 점철된 후에 받아든 어머니의 정성에 감복을 해서였는지는 확실히 기억할 수 없으나 좌우지간 나는 눈물로 밥을 말아먹어야 했습니다. 거친 보리쌀과 수수가 적당히 섞인 잡곡밥에 고구마 몇 쪼가리가 - 요즘에는 웰빙식품이 되겠지만 - 도시락의 전부였지만 그날처럼 맛이 있는 밥은 아직껏 먹어보지 못했으며 더구나 그렇게 행복해 했던 적도 내 인생을 통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초라하고 남루한 당신의 모습을 비관하여 자식이 다니는 학교인데도 차마 들어오지 못하시고 울타리 밑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시다가 때마침 울타리를 드나들던 학생 하나를 시켜 아들을 찾았던 어머니, 그리고 감히 선생님을 찾아가 아들의 매 자국에 항의를 하실만한 용기도 갖지 못하셨던 그래서 너무나 순진한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먹고 자란 나는 오늘, 그러니까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오늘까지 그 날의 눈물 젖은 도시락을 내 인생의 좌표로 삼고 있습니다.

며칠 전 일본에 세미나가 있어 일주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을 하던 길이었습니다. 검색대를 빠져나와 면세점 앞을 막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그 옛날 어머니께서 학교까지 싸들고 오셨던 도시락처럼 생긴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품 하나하나에 종이를 이용하여 도시락 보자기처럼 곱게 싸서 네모난 상자에 담아 놓은 떡이었습니다. 가격도 확인하지 않고 다짜고짜 두 박스를 집어 들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비행시간이었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밤이 늦었습니다. 이미 잠자리를 펴시고 주무실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아들의 낌새를 어떻게 알아채셨는지 아내보다도 먼저 문을 열어 주시며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가슴에 품어오지는 못했지만 제일 먼저 어머니 앞에 그 봉지를 내밀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잘 먹는 한국식 떡(모찌)이라는 설명을 드리면서 맛있게 잡수는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으나 어머니는 한 입 물어보시더니 별로 입맛에 맞지 않으신 듯 이내 물리치시고 마십니다.

보리고개가 있던 배고픈 시절, 그 딱딱한 나무껍질이며 온갖 쑥부쟁이 같은 거친 나물도 끄떡없이 소화를 시켰을 만큼 튼튼했던 어머니의 위장은 어느새 부드러운 떡을 받아들이는 데도 거북해 하실 정도로 약해지셨던 것입니다. 먼 옛날 학교 울타리 밖에서 도시락을 건네주시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던 어머니처럼 그날은 내가 돌아서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쳐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을 들여 가슴에 품어오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후회를 했습니다. 눈물범벅이 된 채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도시락처럼 어머니께서도 맛있게 잡숴주셨더라면 내가 그렇게 서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흘리셨을 단장(斷腸)의 눈물이 나의 아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벌써 45회의 생일을 맞게 된 오늘, 단장의 눈물로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 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덧붙이는 글 벌써 45회의 생일을 맞게 된 오늘, 단장의 눈물로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 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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