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혁명가 난주, 지금은 무엇을 꿈꾸나

소설로 보는 변혁운동의 단면 <난주 1, 2, 3>

등록 2005.12.28 21:09수정 2005.12.2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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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봄, 미술가를 꿈꾸며 교정을 거닐던 스무 살 여대생 난주. 매력적인 그림 한 장만 남길 수 있다면 당장 목숨이 끊어져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과 현실은 난주의 희망인 예술을 사치품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폭력으로 민중을 짓밟고 있는데, 넌 한가하게 예술 타령이냐는 듯한 눈초리들이 껄끄러웠다. 게다가 선배는 사복경찰에 쫓기다가 난주의 눈앞에서 목숨을 잃는다. 난주도 결코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난주는 예술을 버리고 사회주의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다. 공장으로, 감옥으로, 그리고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난주는 조직 내에서 숱한 회의와 인간에 대한 좌절을 맛본다.

"휴머니즘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답게 살고자 운동을 하는 우리가 왜 서로에게 고통이 되고 상처가 되어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또 90년대 사회주의권의 혼란과 조직내부의 붕괴를 보면서 난주는 혁명운동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변혁운동 내부의 문제 여과없이 보여주는 소설

a 장편소설 <난주> 책표지.

장편소설 <난주> 책표지. ⓒ 필맥출판사

장필선의 장편소설 <난주>(전 3권. 필맥출판사 펴냄)를 간추려 본 내용이다. 이 책은 8, 90년대의 운동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니 후일담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난주>는 한마디로 문제작이다. 변혁운동 내부에서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문제들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여과없이 드러낸다. 살짝 엿보는 정도가 아니라 작가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80, 90년대 운동의 일부를 보여주는 만큼 묘사가 사실적이고 과장된 부분이 적다(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비합법 전위조직 활동은 사회변혁운동의 여러 가지 방식 중의 하나였음을 기억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선지 이 책은 단순한 소설로 보이지 않는다. 지은이 장필선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8, 90년대 자신과 동료들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두 갈래로 읽힐 수 있겠다. 한편으론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가, 인간다운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다른 한편으론 8, 90년대 변혁운동의 방식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

"인간다운 사회 만들자던 우리에게도 나쁜 싹이 함께 자라"


소설에서 난주의 문제의식은 주로 조직의 내부를 향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지도부와 중국의 천안문 사태를 두고 "혁명을 보존하기 위해선 (유혈진압도) 어쩔 수 없는 거야"라고 언급하는 애인 강민에게 깊은 실망을 느낀다. 운동에 전념하라며 임신한 여성 활동가에게 낙태를 권유하는 동지들을 보고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게 된다.

심지어는 난주가 애인보다 더 사랑하던 성진의 입을 통해 자신이 조직에 모든 것을 바쳤던 시기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을 부르짖던 우리의 조직과 이념 속에 이미 관료주의, 파벌, 갈등, 음모, 전횡, 기회주의 등 우리가 그토록 저주했던 나쁜 싹들이 함께 자라나고 있었던 역설의 시절"이었다는 인식에까지 이른다.

한발 더 나아가 난주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회의를 넘어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은 네가 생각하듯 그런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야. 인간의 본성 속엔 이기심, 욕망에 뿌리박은 이기심도 있어. 도덕성과 이기심이라는 서로 배타적인 두 개의 성질이 교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야."

난주는 갑자기 절망감을 느꼈다. 정말 그렇다면 선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 구축된 우리 운동의 이론과 사상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난주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3권 164쪽)


난주는 대립되는 두 가지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갈등한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회적 변혁의 당위 사이에서, 혁명의 대의를 강조하는 원칙주의자인 애인 성진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현태 사이에서 선뜻 하나를 택하지 못한다. 어쩌면 난주는 모든 것의 조화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청춘의 회고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나 아름답다

그런데 난주와 비슷한 고민으로 80, 9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이 책은 공감이 가는 부분 못지않게 힘이 빠지게 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마치 "나도 한때는 목숨 바쳐 운동했는데……" 하는 식의 회한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과거 변혁운동에 몸담았던 경험이 곧바로 현재의 빛나는 훈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비합법 전위조직에서 활동을 했던 탓인지 난주는 나이 삼십에 이미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자꾸만 과거를 되씹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난주에게 이 책의 한 구절을 돌려주고 싶었다.

"청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희망. 감상에 빠지긴 아직 이르다. 청춘의 회고는 허약하고 패배적인 것. 회고는 인생의 격동기를 지나 삶의 마지막 순간에나 아름다운 것이다." (2권 14쪽)

80년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난주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인간을 해방시키고 싶다는 자신의 꿈마저 버리고 사는 건 아닐까.

난주 1

장필선 지음,
필맥,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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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법원공무원(각종 강의, 출간, 기고) 책<생활법률상식사전> <판결 vs 판결> 등/ 강의(인권위, 도서관, 구청, 도청, 대학에서 생활법률 정보인권 강의) / 방송 (KBS 라디오 경제로통일로 고정출연 등) /2009년, 2011년 올해의 뉴스게릴라. jundorap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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