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예술프로젝트 행사장에 나타난 장승십자가

안양민예총, '전통문화가치 파괴' 맞서 9차 고행 퍼포먼스

등록 2005.11.07 22:02수정 2005.11.0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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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시민들의 관심속에 장승 고행을 하고 있는 안양 민예총 김영부 사무국장
주위시민들의 관심속에 장승 고행을 하고 있는 안양 민예총 김영부 사무국장이현정
시민사회의 줄기찬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안양시가 야심차게 추진한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개막식이 있던 지난 11월 5일 토요일. 안양유원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두 달 가까이 장승십자가 퍼포먼스를 통해 안양시의 문화예술 행정과 지역차별에 항의해온 만안구 문화의 거리 추진위원회 김영부 집행위원장(37·안양민예총 사무국장)은 그동안 금요일에 해왔던 일정을 하루 미루고, 장소 역시 안양유원지로 옮겨 제9차 장승십자가 고행을 벌였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안양 중앙성당 앞에 나타난 장승지기 김 국장은 여느 때와 달리 장승의 아랫부분에 5m쯤 되는 노란색 천을 드리우고, 온몸을 시꺼멓게 분장한 채 붉은 핏빛으로 군데군데를 적셨다.

한층 더 진해진 분장은 장승지기의 각오가 남다름을 의미하는 것이며, 장승 꼬리에 달린 노란색천은 제1회 안양 공공예술프로젝트로 인해 파괴된 전통과 자연의 상처를 덮어주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상징의 매개체라는 것이 퍼포먼스팀의 설명이다.

오후 4시가 넘어 도착한 안양유원지 입구 주차장에서는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인파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라는 축제를 즐기려는 시민들과 토요일 오후 등산을 하고 돌아가는 등산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한가운데 가로지르는 장승십자가 행진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여기저기서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진다. 이것도 이번 축제의 한 행사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타까워하는 사람과 마냥 신기해하는 모습 등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출렁다리가 없어지고 새로 지어진 철재다리 위에서 외치는 전통문화 가치의 소중함.
출렁다리가 없어지고 새로 지어진 철재다리 위에서 외치는 전통문화 가치의 소중함.이현정
안양유원지 주차장을 거슬러 올라가 예전에 출렁다리가 있던, 그러나 지금은 무참히 철거돼 추억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튼튼한 철재 다리가 놓여있는 곳에 이르자, 장승십자가는 이 곳에 잠시 멈춰 호흡을 고른다.


장승지기 김 국장은 이내 무릎을 꿇고 외친다.

"안양시민이라면 이 곳 유원지 출렁다리에 추억 하나 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곳 출렁다리를 건너며 꿈을 키워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원지의 전통과 가치는 무참히 짓밟히고 여기 이렇게 콘크리트와 철재 다리가 세워졌습니다. 안양시는 전통적인 문화를 살리지 못하고 온갖 서양의 갖가지 구조물로 전통을 파괴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라는 것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축제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던진 후, 잠시 멈추었던 장승십자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장승십자가는 9월 9일 '만안구 문화의 거리 선포식' 1주년을 맞이하여 만들어졌다. 평촌 신도시의 등장으로 안양의 옛 중심지인 만안구는 '변방의 낙후된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지난 2004년 3월 안양시가 발표한 '인도를 축소하고 차도를 확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벽산로 정비계획'을 계기로 시민사회단체와 종교·문화계·재래시장 상인 등이 중심으로 만안구 문화의 거리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 운동은 안양의 역사와 전통의 중심지인 '만안구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면서 26만 만안구 시민들의 문화적 숨통을 여는 출구'로 벽산로를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추진위원회는 벽산로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며 평화적인 문화의 거리 운동에 나섰고, 안양민예총에서는 '2004 경기민족예술제'를 만안구에 유치, 개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안양시는 벽산로를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20년 전 시에서 스스로 지원해 자리를 잡아준 75개소 벽산로 노점에 대해 "흉물이라는 이유"로 강제 철거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문화의 거리를 소망하며 만들었던 장승은 1년 후 십자가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그리고 만안구 문화의 거리 추진위원회 김영부 집행위원장이 만안구 시민들의 소외되어 온 삶과 만안구의 차별을 온 몸으로 감내하는 장승지기가 됐다. 매주 금요일마다 펼쳐졌던 장승십자가 고행은 지난 11월 5일로 9회를 맞았다.

공사중인 광장 전시관
공사중인 광장 전시관이현정
유원지를 거슬러 오르길 30여분. 마침내 장승지기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비틀거리길 두세 번.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기세를 보이며 주위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결국 장승은 채 완성되지 않은 광장전시관 앞에 놓이고, 장승지기는 힘에 겨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엎드려 한참을 있었다.

다시 힘을 내서 움직이기까지 5분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장승지기는 공공예술프로젝트의 개막식이 열렸던 인공폭포 광장에 도착한다.

갑자기 장승지기 김 국장은 등에 장승을 짊어진 채 인공폭포 속으로 뛰어든다. 이내 세차게 몰아치는 낙수 아래 장승을 세워놓고는 김 국장은 뭍으로 나와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키며 고단한 몸을 추스른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미리 작성된 유인물이 뿌려지면서 사람들은 다음에 이어질 행위에 주목한다.

장승지기의 외롭고 험난한 고행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장승지기의 외롭고 험난한 고행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이현정
불과 몇 초 흘렀을까. 시청 공보실에서 나왔다고 하는 이름모를 공무원이 찾아왔다. "제발 여기서 끝내줬으면 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 공무원의 말 속에는 모두가 흥겨워야할 축제에 장승십자가 행렬은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으며, 불청객이라는 생각이 짙게 배어나왔다.

하지만 공무원의 우려와는 달리 유원지를 찾은 사람들에게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장승십자가 행진은 신기한 볼거리인 데다,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의 한 요소일 뿐이었다. 저마다 손에 든 휴대전화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즐기고 있었다.

시민들의 반응 역시 '대외적으로 이 퍼포먼스의 의미를 더욱 많이 알렸으면 좋겠다', '이제껏 모르고 넘겨 왔던 전통의 가치에 대해 새삼 느끼게 되었다' 등 갖가지였다.

민예총 안양지부 퍼포먼스 기획팀 역시 대단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저 시민들이 안양의 문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면 그 뿐이며,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충분히 흡족하다"는 것이다.

인공폭포수에 장승을 넘겨주고 이번 퍼포먼스를 마무리한 장승지기 김영부 사무국장은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며 아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는 안양 공공예술프로젝트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50억원의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준비된 축제가 부실한 준비와 홍보 부족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축제는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설치미술은 설치 중이고, 건물은 채 지어지지 않은 공사장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지는 행사는 그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게 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안양유원지의 제 모습은 어떤 것일까.

"1000년 넘은 불교문화의 중심지이자 역사성이 있는 유원지의 전통적인 가치를 살려야 합니다. 오래된 문화유산들을 그냥 그 자체로 보존하고 지켜야 할 것이지, 콘크리트와 철재구조물로 대치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새로 지어진 철재 콘크리트 건물이나 서양 문물들이 아니죠. 이미 안양유원지는 많은 것들이 파괴되어졌습니다. 그 파괴된 현장을 안양시는 시민 대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구조물로 뒤덮고 있습니다. 이러한 파괴와 뒤엎음은 더 이상 없어야 하겠습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었고 장승지기는 장승을 남겨둔 채 자리를 비운다.

이내 인공폭포광장에 있는 시민들은 폭포를 보며 그들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떨어지는 폭포수 속에 홀로 서있는 장승의 모습은 마치 장승지기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서둘러 어둠을 헤집고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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