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토지>는 하동 아닌 안동서 찍어

세 차례 각색된 <토지> 야외세트장...점차 야외촬영 비중 높아져

등록 2005.05.25 01:52수정 2005.05.2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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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나 드라마로 각색된 <토지>는 어느 곳에서 촬영했을까? 세트장의 모습은 어떠할까? 이런 궁금증이 이 글을 시작하는 동기가 되었다. 1979년 <토지>부터 2005년 <토지>로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먼저 1979년 <토지>의 야외 세트장은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이 곧 세트장이었다. 이 작품은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촬영되었다. 소설 <토지>의 실제 배경인 경남 하동에서 촬영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시간과 경제적 부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987년에 서울에서 하동까지 8시간이나 소요되었으니 이 시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섬진강과 낙동강을 끼고 있는 하동과 안동은 여러모로 비슷한 풍경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에 이 곳이 촬영장소가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실내세트의 비중이 높다. 특이한 점은 현재 남아있는 비디오 자료에서 실내 촬영신은 컬러 화면이고, 야외 촬영 신에서는 흑백이다. 신이 바뀔 때마다 화면이 컬러와 흑백을 오간다. 문제는 1979년 <토지>의 방영시기에 있는 것 같다(1부는 1979. 11. 12-1980. 4. 14까지 방영되었고, 2부는 1980. 5. 12-1980. 8. 4까지 방영되었다. 또 3부는 1980. 8. 18-1980. 12. 29까지 방영되었다).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시청자들은 1, 2부까지는 흑백텔레비전을 통해서 <토지>를 시청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꼼꼼히 살펴봐야 하겠지만 아마도 카메라와 조명 기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시 텔레비전 화면이 흑백이었기 때문에 화면 색깔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시청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토지>는 1987년으로 오면서 컬러화면으로 영상화된다. 또한 최참판가까지 실내세트에서 촬영된 1979년 작품에 비해 최참판가의 웅장한 모습의 야외 세트가 마련되어 실감나는 영상으로 그려졌다.

대구시 달성군 묘동에서 고가들을 개조해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를 시발점으로 평사리에 60가구 한 마을 전체를 초가집으로 개조하고 토담을 쌓고, 드라마용으로 건조한 배 3척을 이용해 강화도에서 바다 장면을 찍기도 했다.


2부부터는 경기도 시흥 야외세트장에서 촬영했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수십 동의 건축물들이 극을 안정감 있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서희의 용정집 등은 실내세트에서 촬영되어 아쉽다.

2005년 <토지>는 이전 작품에 비해 야외세트의 비중이 높다. 야외 세트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하동세트장은 최참판가와 평사리 초가를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그에 비해 횡성의 세트장은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진주와 회령, 중국의 하얼빈, 용정, 일본의 동경, 러시아의 훈춘 등 수많은 지역을 형상화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각 공간들의 특성을 피상적으로 담아내기에 급급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극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최서희의 용정집이나 진주집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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