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예수가 꿈꾸던 나라는?

예수와 국가보안법의 관계

등록 2004.11.30 19:57수정 2004.11.3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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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란 교수 '예수는 국가보안법 희생자' 칼럼 큰 파장

일군의 복음주의자들이 국가보안법 수호를 위해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통치하며 임재한다는 주장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아닌가? 국가보안법이 하나님의 그 기쁜 소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들이 가짜 복음주의자가 아니고서는 복음의 이름으로 이토록 국가보안에 혈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상지대 김정란 교수는 <데일리서프라이즈>에 기고한 칼럼에서, 예수도 어떤 의미에서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이며 희생자라고 주장하면서, 극우단체와 결탁하여 국가보안법 사수 투쟁에 나선 일부 기독교인들을 비판하였다. 그녀의 주장 중에서 다음 구절이 논란의 뇌관이 되었다.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예수가 빨갱이라는 그녀의 표현은 분명히 비유적인 것이고, 그것도 인용에 의한 것이었다. 이 표현에 대해 이성헌 한나라당 제2사무부총장은 “기독교 훼손이 극에 치달은” 망언이라 했으며, 어떤 네티즌은 그녀를 “가롯 유다”라 칭했다.

나는 예수가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이며 희생자라는 김정란 교수의 주장에 찬성한다. 나아가 예수는 국가보안법에 반대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가 당대의 국가 개념에 완전히 반하는 국가론을 펼쳤다는 데 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이 전파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이다(8:12, 19:8, 20:25, 28:23, 28:31).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완곡하게 표현했는데, 이것의 한자어가 바로 “천국”이다. 그러나 이 천국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당”이나 “극락”과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을 때, 그는 어떤 지리학적 장소로 국가를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그것은 어떤 정치학적 통치 활동이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의 모든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어떤 활동에 비유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한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지금 가난한 자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통치 범위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복음이라 칭하면서, 세속적 통치 방식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예수는 반국가단체를 만들고 그것의 활동 방식을 복음이라 부르고 있었다.

예수는 인간에게 진정한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탕자가 어서 돌아와 자기에게 안기를 바라면서 팔을 한없이 넓게 벌리고 있는 아버지의 기다림(누가 15:20), 한마리 잃은 양을 찾으러 나서는 목자의 세심함(누가 15:4), 무한히 빚진 자를 용서해 주는 채권자의 한없는 자비(마태 18:23),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해 저녁 다섯시에도 그를 품꾼으로 고용하는 고용주의 관대함(마태 20:6), 심판을 무한히 지연함으로써 적들에게조차도 사랑의 정책을 펼치는 농부(마태 13:30) 등. 국가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당대의 정치 권력을 전면적으로 조롱하는 것이었다.


저러한 통치 스타일이 실현되는 나라를 예수가 설파했다면, 예루살렘 성전을 축으로 움직이는 종교 권력자들과 로마를 중심축으로 형성된 제국주의자들에게 예수는 진정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이었다. 예수는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곧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마태 26:64).

그들은 자기 옷을 찢고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사형을 언도할 것을 격렬히 요구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는 오직 로마 황제뿐이라고 외친다(요한 19:15). 예수가 자신을 모든 인류가 해방된 나라의 지도자 곧 하나님이라고 선포했을 때, 그는 국가를 참칭함으로써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예수가 묘사했던 새로운 국가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먼저 그 나라는 우리가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점에 놓여 있다(누가 17:21). 그 나라는 출입국 심사를 전혀 하지 않으며, 입국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노력하거나 탐구할 필요가 없다. 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은 없으며, 시민이 되기를 희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민권이 발부된다(마태 22:9). 그 나라는 거기에 들어오는 자들이 가난하거나, 신체적 결함이 있거나, 도덕적으로 흠이 있거나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그 나라의 시민이 되기를 희망하며 무한히 개방적이다(마태 13:47). 오히려 이주민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보이는 기존 시민들은 추방 명령이 내려진다. 그리고 율법의 준수를 통해 자신의 존재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사람들은 시민권이 박탈될 수도 있다(마태 20:14).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시민들조차도 최고 통치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마태 25:40). 그 나라는 서서히 그리고 보이지 않게 팽창하여 온세계를 바꿀 것이다(마태 13:33). 이러한 국가론은 셀롯당, 에네세파, 바리새파 등과 같은 당대의 변혁운동단체들이 꿈꾸었던 이념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예수살렘과 로마의 정치적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설계했던 이러한 국가에 비해, 대한민국 국가보안법이 묘사하고 있는 국가는 얼마나 편협하고 반인간적인가? 따라서 예수는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에 크게 반대했을 것이다. 김정란 교수의 말처럼 예수는 인습적 전통이 설정해 놓은 존재 개념에 저항했다.

만일 당신이 세속적 기득권을 보위하는 데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둔다면 예루살렘과 로마의 붕괴와 함께 당신 영혼도 붕괴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존재 근거를 타자에 대한 무한한 개방성에 둔다면 당신은 예수가 꿈꾸었던 그 나라의 시민이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자기 통치력을 적들을 응징하는 데 발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나라의 진정한 위력은 적들에게조차 사랑의 정책을 실천하는 데 놓여 있다. 적들이 자신들도 사랑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적들은 그 세력을 상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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