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33회

등록 2004.10.11 07:35수정 2004.10.1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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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상에는 미세하나마 애액(愛液)의 흔적과 침자국 등이 있었다. 서랍 등도 뒤졌으나 특별한 것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다만 손바닥만한 미륵불(彌勒佛)을 보고는 손불이에게 물었다.

“이 분이 절에 다니셨던가요?”
손불이는 고개를 끄떡였다.


“여자들은 대개 불공을 드리러 다니지 않는가? 우리 집사람들도 정주 교외에 있는 백미사(柏梶寺)에 가끔 불공을 드리려 다녔다네.”

그 말에 전연부는 다시 서랍에 미륵불을 넣고는 조사를 계속했다. 그 조사는 반시진 이상 걸렸다. 조사를 마친 전연부가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손대인께 말씀드리기 거북하지만 언마님은 방사 중에 피살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니….”

아마 뒷말은 손불이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말과 함께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사실 살을 섞고 산 사이인데 갑작스런 조사로 슬퍼할 겨를도 주지 않고 자신들의 일만 했고, 기묘한 시신을 자꾸 보여 주었자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것은 저 정도 흥분이 되려면 삽입이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상대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이고자 했는지 삽입하지는 않았습니다. 몇 가지 증거는 나왔지만 내부인의 소행인지 외부인의 소행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 분과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죽었습니다.”


“몰래 남자를 만났다면 당연히 가까울 거 아닌가?”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드는 것은 손불이도 인간이니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방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범인은 대개 현장에 다시 온다. 특히 조사가 끝나면 궁금해서 반드시 오려한다.


“이곳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십시오. 제가 데려온 수하 세명을 시켜 이곳을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아직 언마님이 타살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

전연부의 말에 손불이는 문득 생각난 듯 말을 짤랐다.

“두사람 모두 비밀은 지켜 주겠나?”
“이제부터 사람들도 조사해야 하는데..”
“아니....저 년이 방사 중에 죽었다는 사실 말일세.”

소문이 나면 손불이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두 사람은 그를 이해했다. 두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누가 죽였는지 반드시 밝혀내 주게.”
“알겠습니다. 하오면 갈대인께서도 본인을 도와주셔야...”
“알겠네.”

갈유는 얼른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째려 보는 손불이가 죽일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하필 어제....무슨 목적으로 죽여야만 했을까...?”

갈유는 뭔가 음습한 기운을 느끼며 뇌까렸다.

-------------

“어머님. 그곳엔 왜 가셔셔 이리 고생을 하세요.”

갈인규는 그녀의 상세를 살피며 일단 한숨을 놓았다. 갑작스런 충격에 정신을 놓을 뻔했으나 갈인규의 처치로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래... 그래도 네가 곁에 있어 다행이구나.”

갈인규는 경여에게 항상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자신을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고 돌보아 주신 분이었다. 갈인규가 손가장에 있을 땐 주위의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손수 준비하고 챙겨 주었다. 어제도 본래 갈인규가 머무는 전각을 청소하고 준비해 준 것은 알았지만 그는 애써 담천의와 방을 같이 사용했다.

“죄송해요.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네 마음만이라도 그러면 됐다. 그나저나 이런 때 말할 것은 아닌데....”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같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자식이 아무리 섭섭하게 해도 자식에게는 맹목적인 사랑을 주게 된다. 그녀는 갈인규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예전엔 내 손의 반도 안되었는데 이젠 내 손의 두배이구나.”

세월은 그렇게 흐르는 것이다. 아장아장 걸었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머리 하나 이상 커 있는 것이 자식이다.

“나는 네 어린 모습을 다시 보고 싶구나.”
“예...? 무슨 말씀이세요.”
“세월을 돌릴 수 없으니 너를 닮은 아이라도 안아 보고 싶다는 말이다.”

경여는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말 그대로 혼인이야기다.

“혹시 사귀는 처자라도 있니? 같이 온 두 처자도 모두 훌륭하더구나.”
“없어요. 그리고 같이 온 두 소저도 만난지 이틀밖에 안되었구 인사 정도 한 사이예요.”
“그렇겠지. 네 부친과 함께 있으니 어디 다른 데 눈을 돌릴 수도 없겠지.”

갈유가 항상 갈인규를 데리고 다니니 여자와 사귈 시간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 말은 확실히 맞았다. 갈유는 갈인규가 성장하자 그 간의 부정(父情)을 만회하듯 갈인규와 항상 같이 다녔다.

“그래서 말인데... 네 부친께는 아직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만 내가 눈여겨 본 처자가 있구나.”

경여가 본격적으로 나오자 갈인규는 내심 당황했다. 스무살이 되도록 자신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야기다.

“어머니.. 소자는 아직..”
“네 나이 스물이다. 빠른 사람들은 벌써 가정을 이룰 나이야. 나는 네가 네 부친처럼 강호를 떠돌게 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 배울 것이 많아요.”
“결혼하고 가정을 가진다고 못 배우는 것은 아니다. 네가 가정을 이루면 네 부친도 같이 살 수 있으니 괜찮은 생각이 아니냐?”

갈인규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궁색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다. 경여는 그것이 일단 반 승낙의 의미로 받아 들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 두 번인가 들른 처자인데 산서(山西) 설가(薛家)의 여식이다. 올해 열 아홉이고, 미색도 같이 온 두 처자에 뒤지지 않더구나. 내가 본 바로는 참하기도 하고..”
“어머니...!”

“아니야...중이 제머리 못 깎는 법이다. 부친은 표국업을 하는 분인데 산서상인(山西商人)들 중에서도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고 상가(商家)이기는 하나 법도(法道)와 예절(禮節)이 깎듯한 집안으로 보이더구나.”

경여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더구나 상대는 중원 천지 어디에 내 놓아도 괜찮을 집안이다. 산서상인들은 군수물자 조달과 운송으로 커 온 상인들이다. 따라서 표국업은 강남보다는 강북이 훨씬 규모도 컷고, 전문적이었다.

갈인규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어쩔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심하기가 어렵지 작정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체구는 왜소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구척장신의 거구로 생각하기 쉽다.

“아직.. 소자는 준비가 되지 않...”

그가 당황해 하자 경여는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혹시 산서에 갈 일이 있으면 설가장을 들러 보거라. 아마 내가 보냈다고 하면 며칠은 편하게 지낼 수 있을게야.”
“....”
“네 부친께는 시간 나는 대로 말씀드리마.”

그녀는 못을 박았다. 이제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생기지 않는 한 그렇게 밀고 나갈 것이다.

“이제 나가서 일보렴.”

갈인규는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터에 그녀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일어섰다. 하지만 문을 나서는 그의 뒤로 들여온 그녀의 말은 못을 박아도 아예 빼지 못할 대못을 치는 소리였다.

“네가 살 집도 마련해 놨다. 의원을 겸해서 살만한 아담한 곳이야.”

갈인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굳이 경여의 생각에 반대하거나 불효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그가 그녀의 사랑에 보답해 줄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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