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29회

등록 2004.10.03 08:54수정 2004.10.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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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젊은 사람이 새벽잠이 없군.”


나이를 먹으면 잠이 없어진다. 특히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던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서 새벽잠이 없어진다. 뿌연 어둠 속에서 보이는 사람은 괴의 갈유였다.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대인.”
담천의는 그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앉지.”
자연스럽게 꾸며놓은 바위 턱에 걸터앉으며 옆자리를 권했다. 담천의가 자리에 앉자 갈유가 돌아보며 말했다.

“몸은 괜찮은가?”
“갈소협의 도움으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갈인규의 의술도 제 부친 못지않은 듯싶었다. 그는 능숙하게 담천의를 치료했고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다시 터진 상처도 아물고 있었다.


“잠깐 진맥을 해도 되겠나?”

갈유는 담천의의 대답을 듣지 않고는 담천의의 팔목을 잡고는 진맥하기 시작했다. 담천의는 팔목에 기이한 기류가 느껴졌다. 아마 갈유의 독특한 진맥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허열(虛熱)이 있군. 잠깐 혀를 길게 내빼 보겠나.”

갈유는 그의 혀 깊숙한 곳까지 살피더니 다시 그의 머리 뒤쪽에 있는 풍부혈(風府穴)부터 천주혈(天柱穴)과 대추혈(大推穴)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모두가 치명적인 사혈(死穴)들이다. 갈유가 마음만 먹는다면 담천의는 이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다.

“자네 운용하다보면 열이 느껴지지 않던가? 지금도 열이 약간 있는 것도 같고.”
“다소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최근에 무슨 영약이나 영물(靈物)을 먹은 적 있나?”

담천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없다.

“그런 적이…….”

그는 문득 동굴 속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입속에 맴돌던 향긋한 냄새를 기억해 냈다. 있다면 그것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혼절해 있는 동안 무언가 자신을 위해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심한 부상에서 몸을 추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있었습니다. 이틀 전인가 상처 치료를 위해….”

“그랬군. 무언지 모르지만 진귀한 것이네. 너무 좋은 재료가 들어간 것이라 자네가 모두 흡수하지 못하고 있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진기의 흐름이 늦어지고 있지. 이러다 시기를 놓치면 굳어지게 돼.”

갈유의 말이라면 맞는 말일 것이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귀한 영약일 것이다. 깨어났을 때 그녀가 보여 준 반응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자네가 충분히 쉬면서 운기를 하였다면 흡수할 수 있었겠지.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귀중한 것을 허비하고 고생할 필요는 없지.”
“괜찮을 겁니다.”

“출발은 점심때나 되어서 할 것이네. 노부가 탕약을 보낼 것이니 조반을 들지 말고 탕약을 마신 후 계속 운기를 하게. 그러고 나면 제 몸이 돌아올 거야.”
“그렇게까지 수고를 드릴 필요야….”

담천의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갈유는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도 약값 때문에 그러나? 자네 같은 빈털터리에게 약값 달라고 할까봐?”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노부의 약값은 공짜가 없어. 비싸기도 하지. 자네에 대한 내 약값은 나중에 노부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아마 담천의가 느끼는 마음의 부담을 덜게 하려고 그러는 것일 게다. 갈유의 부탁이라면 약값이 아니더라도 들어줄 수 있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시키시지요.”
담천의는 gms쾌히 받아들였다. 더 이상의 사양은 사양이 아니라 거절이다. 갈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는 조금 손해 본거야. 조반은 이집 안방마님이 직접 만드는 연포탕(蓮鮑湯)이거든. 정말 일품이지. 자네는 그걸 못 먹게 되었군.”

갈유는 짓궂은 웃음을 띠우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담천의는 그의 뒤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 살만한 것이다. 아마 명의인 갈유는 담천의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차 안에서도 갈유는 그래서 진맥을 해보고자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는 통에 하지 못했다.

영약이란 먹는 사람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다. 또한 아무리 좋은 영약이라도 그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독약(毒藥)이 될 수 있다. 본래 약이란 독의 이면(裏面)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한사람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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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포탕(蓮鮑湯)은 죽순과 전복을 주재료로 말린 해삼과 쌀을 불려 볶은 다음 한 시진 정도 끓여서 만드는 죽이다. 손불이의 조강지처(糟糠之妻)인 경여(景茹)가 직접 만드는 연포탕은 손불이의 친구라도 잘 얻어먹지 못한다. 한번 먹어 본 사람은 다시 먹기를 학수고대할 정도지만 그녀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음한 다음날 아침의 연포탕은 손불이조차 은근히 기대를 하지만 그 역시 매번 먹을 수는 없다. 경여는 손불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녀가 몸집이 크다던가, 힘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왜소했고, 오십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음에도 가냘 펐다. 그리고 뛰어난 미모도 아닌 오히려 시골구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손가장 내에서 그녀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 손가장의 대소사 모든 것을 처리하고, 절대 큰소리가 집안에 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손불이의 후처나 첩실들도 경여에게 만은 고개를 들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손불이는 그녀와 결혼한 지 벌써 사십여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녀에게만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경여는 그가 어려울 때 언제나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고, 그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그녀는 그 위기를 과감하게 풀어나가는 동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허, 친구 덕으로 오랜 만에 먹어 보는 연포탕이군.”

손불이는 경여가 직접 손님들에게 떠주는 연포탕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하녀 한명이 옹기솥을 들고 따라 다니고, 경여는 손님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뜨거운 연포탕을 그릇에 담아 주었다. 주방에서 덜어 올 수도 있지만 옹기솥에서 바로 담아 주는 것이 향이나 맛에서 연포탕의 진미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 제수씨의 연포탕은 언제 먹어도 그 맛이구려.”
한 숟가락을 입에 넣은 갈유가 감탄을 터트리며 한 말이었다.

“갈대인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준비했지요.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많이 드세요. 너도 많이 들고.”

갈유의 옆에 않아 있던 갈인규에게 듬뿍 퍼주면서 한 말이었다.

“오랜만에 뵙게 되었습니다. 어머님. 어제 밤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너무 늦은 시각이고 일이 있어”

갈인규는 죄송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손가장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이 경여다. 하지만 경여는 서운해 하는 표정이 없이 갈인규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띠웠다.

“이년 전만 해도 애티가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늠름한 사내대장부가 되었구나. 때맞춰 식사나 하는지 걱정했구나.”

경여에게 있어 갈인규는 자식과 다름없다. 아니 자식이다. 아이가 없는 그녀에게 태어난 지 일 년도 못되어 자신의 품으로 들어온 갈인규를 길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일이었지만 갈인규는 그녀가 기른 그녀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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