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도 '귀국' 중입니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쉬운 일이 아니군요

등록 2004.09.13 13:16수정 2004.09.1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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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8월 초에 귀국했다. 8월 25일 2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찬진이는 소학교 1학년에서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되었다. 이제는 친구도 생기고,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맘이 놓인다.


사실 나는 찬진이가 귀국하여 전학해도 무사히 잘 적응할 것으로 믿었다. 우선 "아이가 언어도 문화적으로도 너무나 낯선 일본에서도 잘 적응을 해왔는데, 물도 말도 익숙한 우리나라에서쯤이야"하고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국 후 우리에게 놓여진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걱정이 생겼다. 2학기가 시작되고 아이가 근처 초등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 벌써 한 달여가 훌쩍 넘었는데도 나는 등교시간이나 하교시간에 여전히 맘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등교시간에는 같이 집을 출발해서 신호등 건너는 모습을 보고 내 일터로 가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준비물을 사서 보내기도 한다. 오후면 친정엄마가 멀리서 아이의 하교를 지켜보고 계신다. 아직도 내가 맘을 못 놓는 것이 아이에 대한 나의 과잉보호 때문일까?

일본에서 찬진이는 입학식이 있던 날 아침부터 혼자 학교에 다녔다. 집에서 출발하여 횡단보도를 두 개나 건너 학교에 갔고, 수업을 마치고 혼자서 하교를 했다.

우리나라도 아닌 낯선 곳에서는 혼자서 잘도 다니던 딸이 정작 우리나라에 와서는 혼자서 등교하는 것이 그렇게 맘졸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서나 이곳에서나 집에서 출발하여 학교에 가려면 횡단보도 2개를 건너는 것은 똑같은데 말이다.


찬진이가 초등학교까지 가면서 건너는 횡단보도는 2개이다. 하나는 신호등이 있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호등이 없는 것이다. 집에서 출발하면 먼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이곳은 사거리 모양을 하고 있는 곳인데, 신호등 없이 바닥에 흰줄만 그어졌다.

횡단보도에서는 사람이 지나든 아니든 일단 정지하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그것을 지키는 차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고 맞은 편 하늘에 떠있는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할라치면 건너는 보행자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적반하장 격으로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오히려 보행자를 향해서 클랙슨을 빵빵 울려댄다. 마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큰 교통위반이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황은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도 나을 것은 없다. 몇 발자국 뗄까 하면 깜빡깜빡 거려서 사람을 조급증 나게 만든다. 어른의 걸음에도 그런데 하물며 초등학교 1학년생이 시간 안에 걷기는 정말 무리다.

횡단보도 거리는 일본의 2배가 넘는데도 신호등은 2배보다 더 빨리 꺼진다. 게다가 우회전하는 차량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사람이 건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빨리도 달린다.

찬진이가 전학하고 나서 부모인 내가 적응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준비물에 관한 것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정리 좀 하고 아이와 함께 마주하다 보면 8시가 넘는다. 그때서야 아이가 숙제를 다 했는지 확인하고, 알림장도 확인하게 된다. 알림장에는 다음날 준비물이 적혀 있다. 내일 교과과정에서 쓰게 될 준비물이라도 적혀 있는 날이면, 나는 맘이 조금 불안해진다. 일하는 엄마들을 생각해서 주말에 미리 알려줬으면 미리 준비하고 좋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다른 아이들이야 혼자서 가게도 잘 가서 준비물도 잘 사지만 찬진이는 아직도 그것에 익숙하지 않다. 어떻든 주어진 상황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아이에게 돈을 쥐어 주면서 준비물을 구입하게 하지만, 아이는 문방구에 가는 것을 정말 부담스러워 한다.

다른 애들은 잘도 하는데 왜 너는 그것도 못하냐고 윽박지르는 것도 지쳐서 어느 날 아이와 함께 타협하고 문방구에 가기로 했다. 우선 아이에게 엄마는 밖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네가 혼자 들어가서 물건을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찬진이가 문방구에 들어갔다. 문방구는 아침 등교시간이라 많이 붐볐다. 주인 부부는 이곳 저곳에서 불러대는 꼬마손님들에게 물건을 파느라 분주했다. 한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찬진이보다 뒤에 들어간 아이들은 속속 물건을 사 가지고 나오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찬진이가 나오지 않는다.

슬쩍 엿보니 찬진이는 한 손에 돈을 쥐고 앞쪽에 서서 그대로 있는 것이다. 보다 못해서 "찬진아. 너도 아저씨 불러서 큰 소리로 필요한 물건을 말하고 사와"했더니, 찬진이가 몇 차례 시도를 하다가 그만 눈물을 터뜨리면서 나온다. 그렇다. 찬진이는 그냥 기다리면 제 순서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기다렸는데, 제 순서는 어디에도 올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찬진이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아이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은 물건을 사러 온 아이들이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맨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줄을 서지 않았고, 미리 온 사람이 있는데도 뒤에서 큰 소리로 말만 하면 얼마든지 먼저 물건을 구입해 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내가 들어갔다. 그리고 물건을 구입해줬다. 찬진이에게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찬진아 여기는 일본이 아니야. 한국에서는 문방구에 가면 필요한 것을 큰 소리로 말해야 해.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은 바보야"라고 해야 할까. 순간 고민이 되었다.

그때서야 찬진이가 왜 그렇게 준비물을 사러 혼자서 문방구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이해되었다. 마침 만난 선배에게 이 상황을 말했더니 웃으면서 "아직 네가 몸만 귀국했지 아직 맘까지 귀국이 안되어서 그래. 빨리 완전히 귀국하는 것이 한국에서 살기에 편해"한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찬진이와 함께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준비물을 사주고 일터에 나왔다. 오늘 아침도 신호등은 빨랐고, 자동차들은 보행자를 무시하고 달렸다. 여전히 문방구는 무질서하게 붐볐다.

우리 찬진이는 언제나 혼자 가게 되어도 걱정이 안될 것이며, 저 아이들처럼 혼자 들어가서 제 준비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때가 되면 나나 우리 딸은 정말로 완전히 귀국하게 되는 것일까? 완전히(?) 귀국하는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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