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풀어내는 우리 시대 글쓰기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의 창작론)

등록 2004.09.03 21:30수정 2004.09.0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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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대중소설가가 자신의 글쓰기 삶을 솔직담백하게 기술해 놓은 <유혹하는 글쓰기>는 지나치게 이론화되거나 형식화된 쓰기 이론서와는 다르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과 밀착된 자신만의 글쓰기 삶을 소설가다운 말솜씨로 풀어내고 있다. 번역서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번역자의 매끄러운 번역과 작가의 재치 있는 말솜씨가 잘 어우러진 읽기 쉽고도 재미있는 쓰기 지침서다.


수많은 쓰기 이론서가 시중에 나와 있지만 정작 초보자들이 참고할 만한 쓰기 지침서는 매우 드문 것이 우리의 독서 현실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쓰기 지침서는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전범으로 하여 더하고 뺀 것이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실상 그 책은 전문적인 작가를 위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초보자들이나 글쓰기 비전문가들에게 내용상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쓰기 지침서는 이 책을 전범으로 하고 있으니 시중에 나온 많은 쓰기 지침서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 교육 현실에서는 논리와 논술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위장한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실상 이런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니다. 입시에 초점을 맞춘 대부분 논리 논술 관련 책들은 학생들의 쓰기를 더 어렵게 만들고 우리 학생들을 글쓰기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글쓰기는 논리 표출 이전에 글쓴이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여러 파편들을 밖으로 표출하는 양식이다. 여기에 문법학자나 논리학자가 불필요한 여러 장치들을 적용시켜 글쓰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글은 명확한 논리와 문법 규칙을 정확하게 준수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 속에 글쓴이의 살아 숨쉬는 흔적들이 녹아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이란 논리와 문법 이전에 우리 삶의 온전한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문법과 논리라는 장치를 무조건적으로 들이댄다면 마치 온전한 삶을 죽여 또 다른 삶을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문법 중심의 문장에서 벗어나 더 큰 단위에서 생각하고 표출해야 하며 진정으로 쓰고 싶을 때 펜을 들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만 연달아 쓰다 보면 글이 너무 딱딱해져 유연성을 잃게 된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p163)


문단이란 그 내용에 못지 않게 생김새도 중요하다. 문단은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지도이다.(p159)

나는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단위라고-거기서부터 의미의 일관성이 시작되고 낱말들이 비로소 단순한 낱말의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고-주장하고 싶다. 글이 생명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면 문단의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p164)

내가 글쓰기를 다른 일보다 좋아하는 이유를 딱 하나만 꼽는다면 이렇게 모든 것이 일시에 연결되는 통찰력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런 현상을 가리켜 '핵심을 찌르는 사고력'이라고 불렀다.(p251)

작품에 대한 부담감이 유난히 큰 날은-즉 '쓰고싶다'가 아니라 '써야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날은-작품 자체도 엉망이 되기 싶다. 창작 교실의 심각한 문제점 중 하나는 그 '써야 한다'가 아예 일반화된다는 사실이다.(p288)


우리 학교교육 현실에서 쓰기 과목 하면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과목 중 하나다. 하얀 백지 위에 제목 주고 무조건 써내라 식의 강압을 우리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경험하게 된다.

학생들은 그들의 획일화되고 단편화된 경험들을 무조건 논리적이고 멋들어진 글로 만들어 내라는 압력 아닌 압력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의 삶과 마음을 담은 글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이 책은 그런 상황에 뭔가 경고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는 듯하다. '쓰고싶다'가 아니라 '써야한다'는 상황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글쓰기 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과 밀착된 소설 창작의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작가의 이력서와 인생론을 통해 글쓰기와 관련하여 불완전하게나마 생애교육의 단편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글쓰기는 불완전한 삶에서 시작하여 완전한 삶을 향해 가는 지향 의식이다. 삶은 없고 문자라는 형식만 빌어 억지로 밀어낸 글쓰기는 삶을 도리어 힘들고 억압하는 요소가 된다.

그렇다고 이 책의 모든 부분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인기 있는 대중소설가의 글쓰기 지침서이기 때문에 소설 창작에 한정되었다는 점, 번역서기 때문에 우리 글쓰기와는 약간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글은 때론 그 모양과 느낌이 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흥미와 재미에만 집중한다는 점 등에서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리뉴얼판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김영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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