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가테이카이'는 당연한 것 아닌가요?"

[현지보고] 자녀 많이 낳으라면서 한국엔 이런 제도 왜 없나

등록 2004.06.06 12:17수정 2004.06.0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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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원
고등학교 때부터 소식을 전하고 사는 친구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 친구는 나처럼 늦은(?) 결혼을 한 뒤 딸 하나를 둔 직장여성이다. 내가 한국에 살 때 종종 아이 키우는 일이며 사는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친구가 보낸 메일에는 '요즘은 왜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친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방과후 열쇠를 열고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 들어가 혼자 있어야 하는 딸에 대한 걱정이었다.

친구의 바람은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을 자유롭게 놀리면서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방과후 혼자 아무도 없는 집에서 위험하게 있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어쩔 수 없이 방과후 수업도 시키고 학원도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아이는 언제나 엄마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한다.

아이는 처음에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많이 울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혼자 곧잘 있지만 엄마로서 가슴이 아픈 것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란다. '애한테 이렇게까지 하면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지' 회의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너무나 맘아프고 속상하다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메일을 읽고 난뒤 마음이 아프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나도 걱정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당장 귀국하면 큰 아이 찬진이도 똑같은 상황에 놓이게될 테니 말이다. 나도 직장여성이지 않은가. 그 긴 시간 동안 아이 는 뭘하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당장 열쇠를 목걸이처럼 걸고 다닐 찬진이 모습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아이들을 좀 놀게 하지 뭐하느라고 이 학원 저 학원 ‘뺑뺑이(?)’시키면서 애들을 혹사시키느냐”고 한다.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말했다. 그저 극성스런 부모 탓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부모의 선택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선택에는 일부 지나친 교육열이 원인인 경우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방과후 집에 혼자 방치되는 아이들의 안전때문이었다는 것을.

일본에 와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적어도 일본의 일하는 여성에게 주어진 여건이 한국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좋다는 상황이다. 최근에도 일본정부는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는 정책을 꾸준히 만들어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현실적인 대안은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모든 양육을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는 한국정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내가 남편과 떨어져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행을 결심했을 때 주위에서 가장 걱정한 것은 “과연 현실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였다. 그런 주위의 걱정에 나는 여건이 안 되면 중간에 그만 두고 귀국한다는 각오로 일본에 왔었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 와서 보니 몸은 많이 힘들지만 아이들 걱정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줄었다.


작은 아이 찬현이는 현재 보육원에, 큰 아이인 찬진이는 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닌다. 찬진이는 아침 8시 20분까지 등교하고, 오후 5시에 하교한다. 그러면 일본 소학교는 1학년들도 하루 종일 수업을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보통 2~3시를 전후해서 수업이 끝나는데, 나머지 시간은 학교의 '라이온회'에서 지내다가 온다.

일본에는 일하는 엄마들을 위한 여러 가지 보육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방과후 봐주는 프로그램이다. 보통 일본말로 ‘루스가테이카이’(留守家庭會)라고 하는데 찬진이네 학교에서는 그 명칭이 ‘라이온회’인 것이다.

이 방과후 프로그램은 거의 대부분의 학교가 운영하는데, 학교 안 또는 학교 근처에 위치하고 있지만 학교 프로그램과는 별도로 운영된다. 대개 몇 명의 보육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설 및 제반 운영비는 시에서 제공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제공될 간식비를 내면 된다.

물론 이 프로그램에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1학년부터 3학년까지만 해당되며, 학교에서 귀가했을 때 혼자 지낼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자격이 주어진다. 집에 돌아가서 혼자 있게 되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운영되는 것이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언니 오빠 등 누구라도 있으면 그 프로그램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학년초가 되면 라이온회에 아이를 들여내고자 하는 부모들은 재직 증명서 등 각종 서류를 제출하여 주간에는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소학교 입학 후 찬진이는 라이온회에 들어갔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찬진이네 반 27명 중 13명 정도가 라이온회로 하교한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보육 선생들의 지도로 숙제도 하고, 2, 3학년 선배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게임도 한다.

일본의 경우도 대부분 형제들이 적은 편인데, 라이온회는 형제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공동체 생활을 배우는 중요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찬진이는 ‘라이온회’에서의 생활을 재미있어 하는 듯하다. 종종 한국에도 “라이온회가 있나요?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걸 보면. 찬현이는 보육원에서 종일 지낸다. 덕분에 나는 아이의 등교시간에 맞춰 집을 출발하여 학교에 갔다가 아이들의 귀가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온다.

물론 아이없이 혼자 지내는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공부시간이지만, 적어도 낮시간 만큼은 아이들 걱정에서 해방되어 내 일을 잘 할 수 있다. 그 나마 이렇게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심되는지 모른다.

일본에 와서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는 일본인에게 "우리 아이들을 보육원과 ‘라이온회’에 보내고 있는데 나처럼 일하는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루스가테이카이(방과후 아이들을 봐주는 프로그램)는 제가 소학교 다닐 때에도 있었는 걸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럼, 한국에는 없나요?”

그 대학원생의 나이 우리 나이로 27살 정도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보육정책은 일본에 비해 적어도 20년 이상은 뒤처졌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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