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죽을까봐 잠을 못 자겠어요"

제가 몸살을 앓는 사이, 아이가 부쩍 큰 것 같아요

등록 2004.05.11 10:54수정 2004.05.1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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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염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이곳 일본에서 아이들의 유일한 보호자인 내가 자리에 눕게 된 것이다. 남편 없이 아이 둘과 외국에 머물게 되면서 가장 걱정한 것은 내 몸이 아프게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아프면 내가 좀 힘이 들겠지만 보살펴 주면 된다. 그러나 보호자인 내가 아프면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들을 누가 봐줄 것인가?

얼마 전부터 큰 아이인 찬진이가 편도선이 붓더니 온 몸에 빨간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은 골든위크(4월 말부터 5월 초 약 1주일 간의 황금연휴)라 병원이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집에서 여러 가지 민간요법으로 약을 대신하다가 겨우 휴일이 끝나서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몸이 많이 피곤해진 상태라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찬진이는 소학교에 들어간 후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게 된 모양이다.

다행히 찬진이는 빨리 나았지만 이제는 내가 몸이 아프다. 8일 저녁부터 편도선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편도선이 약한 편이어서 편도선이 붓게 되면 동반되는 여러 가지 고통스런 증상을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서둘러 소금물로 목을 헹궈내고, 집에 있던 종합감기약을 먹었다. 하루밤 자고 나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목이 더 심하게 따끔거려서 침을 삼키기조차 어려웠다.

마침 일요일이라 병원에도 갈 수 없다. 나는 빈 속에 종합감기약만 자꾸 먹어서 그런지 하루종일 약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해서 서서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주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이들의 아침밥은 그냥저냥 챙겨주었다. 나는 점심으로 집에 있는 빵과 우유를 찾아서 먹으라고 찬진이에게 시켜놓고,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둘째 찬현이는 빵과 우유를 먹어서 그런대로 끼니를 해결했지만, 먹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찬진이는 점심을 그냥 굶었다. 저녁 7시가 넘어가자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며 밥을 찾았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찬진이 입에서 밥을 달라는 소리가 나올까 싶어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반찬도 없고, 나도 하루종일 빈속이라 무국이라도 끓여서 같이 먹어야할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무와 소고기를 꺼내 국을 끓이는 동안 나는 두 번이나 누워야 했다. 겨우 겨우 밥을 차렸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만 먹으라고 해놓고 나는 침대에 와서 다시 누웠다.

아이들도 엄마가 아픈 것을 알았는지, 차려진 밥을 고스란히 남겨놓은 채 옆에 와서 나란히 눕는다.

어린 찬현이는 잠을 청하는데, 찬진이는 10시가 되어가는데도 잠을 자지 않고 연신 눈물만 닦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찬진이는 "엄마가 죽을까봐 잠을 못자겠어요, 엄마는 왜 밥을 안 먹어요?"라고 묻는다. "엄마는 이런 일 가지고는 죽지 않으니까 걱정말고 자라"고 했더니 "엄마!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죠? 그러니까 죽지마세요" 한다.

아침이 되었지만 몸은 여전히 아프다. 그러나 내가 해야할 과제(?)는 언제나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아이들을 학교 앞까지, 유치원까지 데려다 줘야한다.

몸을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니 찬진이가 어느새 따라 일어난다. 찬진이는 여느 아침 같으면 7시까지 늑장을 부렸을 텐데, 6시 30분에 일어나서 혼자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세수를 하고, 동생을 깨워서 세수를 시킨다. 찬현이도 사태를 잠작했는지 언니 말을 순순히 따른다.

아침 준비를 하고 있노라니 찬진이가 “엄마 제가 도와드릴게요”하면서 숟가락 통을 집어가더니 숟가락과 젓가락을 식탁에 가지런히 놓는다. 이전 같으면 잔소리를 해야 겨우 할 텐데….

비몽사몽간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병원에 다녀왔다. 하루종일 학교에도 가지 않고, 밥과 약을 챙겨 먹고 누워있으니 한결 몸이 가벼웠다. 적어도 어제와 같은 상황은 아닌 것같았다.

오후 5시가 되어 유치원에 찬현이를 데리러 가니 찬진이가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 나는 반가워서 웃었는데, 찬진이는 웃지 않고 내 안색만 살폈다. 아마도 내가 걱정이 되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엄마 오늘 병원에 다녀왔고, 약을 먹었더니 많이 좋아졌어"라고 말하니까, 찬진이가 그제서야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학교에서도 엄마 걱정을 많이 했단다.

돌아오는 길에 찬진이는 몇 걸음 옮길 때마다 엄마가 오늘 밥은 먹었는지, 몸은 어떤지 자꾸 묻는다. 제 딴에는 많이 걱정이 된 모양이다.

집에 돌아온 찬진이는 스스로 책가방을 제 자리에 가져다 두고, 급식으로 먹다 가져온 빵도 냉장고에 챙겨넣는다. 또한 찬현이에게 간식도 챙겨주었다. 찬진이가 이런 일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저녁을 차리니 아침처럼 숟가락과 젓가락을 식탁에 가지런히 챙겨놓고, 식사 후에는 설거지통에 그릇을 가져다 놓았다.

밤이 되었다. 나란히 누우니 찬진이가 "엄마, 지금도 많이 아파요? 엄마, 아프지 마세요.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죠?"라고 말한다.

"지금은 조금 아프지만, 곧 나을 거니까 안심하고 잘 자"했더니 찬진이는 "예"하고 잠을 잔다. 어제는 잠을 설치더니, 오늘은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몸살로 많이 힘들었지만, 언제나 어리다고 생각했던 딸아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큼 커 버렸음을 느꼈던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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