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혐오와 동물사랑은 최악의 조합이다

김선영 지음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록 2004.03.15 22:43수정 2004.03.2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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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노모께서 잡견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오신 적이 있었지요. 버려진 개인데 졸졸 따라오더랍니다. 이름을 복실이라 불렀지요. 어린 저는 복실이를 무던히도 괴롭혔답니다. 촌스러운 몸매에 못 생기고 냄새나는 개. 그런 복실이가 저만 보면 무작정 반기는 꼴이 싫었던 게지요. 불현듯 등장해 한 해를 같이 살았던 복실이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노모가 암으로 투병을 할 때입니다. 아는 분이 몸보신하라고 큰 백구를 집에 가져다 놓았었지요. 짖지도 못한 채 두 눈만 껌벅이는 백구를 끌고 저는 왕십리 개시장으로 갔지요. 그날 그 순간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도살꾼에게 끌려가던 백구의 뒷다리에 팽팽하게 일어서던 새파란 힘줄이 얼마나 무서웠던지요.

제가 손수 개를 기른 것은 스물여덟살이 되어서입니다. 몰티즈의 피가 섞인 생후 2개월된 잡견이었지요. 이름은 망치였답니다. 매일 아침 작은 발로 제 방문을 복복 긁어 대던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네요. 8개월을 방에서만 키우다가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 풀어 놓았더니 미친 듯이 뛰놀더군요. 저는 다음날 아침에 마당이 달린 선배네 집으로 망치를 떠나보냈지요. 그때 처음으로 개의 행복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한 고민을 했지 싶습니다.

그 뒤로 저는 개와 연을 맺지 않았지요. 하나 큰 누님이 세마리, 여자 친구가 한마리, 사촌 형님네가 한마리, 동네 편의점에 두마리 등등. 어느새 제 주변에 애완견이 그리도 많아졌던지요. 세가구에 한마리 꼴로 키운다더니 제가 낀 대화에도 개 이야기는 끊이지를 않더군요. 애완견을 빼면 가족이 해체될지 모른다는 농담이 현실이 된 셈이지요. 그렇게 사람 곁에 개가 있고 개 옆에 사람이 있는 풍경이 우리네 일상이 되어 있더군요.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은 말합니다. 가족이라고 자녀라고 반려동물이라고. 반면 키우지 않는 이들은 애완견의 공공장소 배변과 억지 성대수술과 사치 명품견 풍조를 곱지 않게 바라보지요. 그래도 애완견은 날로 늘어나서 텔레비전의 단골 주인공이 되고 개를 위한 전용 병원과 까페와 펜션과 아파트까지 사람 부럽지 않게 대접을 받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 모두 외로우니까요. 함께 살아갈 생명체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이쯤해서 전에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개를 친구처럼 대하는 것, 개를 사랑하는 것, 개를 개답게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애완견과 애견의 심대한 간극이 생겨납니다. 애완견(愛玩犬)이 '사랑스러운 장난감 개'라는 뜻이라면 애견(愛犬)은 '사랑하는 개'라는 뜻이겠지요.

장난감은 쓰다가 버려도 되는가 하면 신주단지처럼 받들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낮춰지고 높여지는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경우든 있는 그대로 인식되지 못하니까요. 일방적인 관심과 요구에 의해 대상화되고 타자화되는 거지요. 이런 상태의 개라면 존재론적으로 사람의 노예라고 봐야 할 것 같네요.

물론 개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 늑대나 자칼이 사냥개로, 집개로, 애완견으로 유전적 진화를 거듭한 특별한 동물입니다. 그 역사가 10만년은 된다니까 만만한 동물이 아니지요. 동시에 이 진화의 역사는 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과 개는 상호적인 욕구와 소통을 통해 눈높이를 하면서 서로를 길들여온 관계인 것이지요.

따라서 개가 사람에게 애견이 되고 사람이 개에게 애인이 되는 과정은 관계 지향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개의 마음을 읽어야 하고 개가 사람의 의중을 알아야 하지요. 여기에 이르면 새로운 자각이 싹트는 법입니다. 사람이 개를 사랑하는 것보다 개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몇 곱절 순수하고 지극하며 정성스럽다는 점. 이 사실을 수용하고 개 앞에서 사람됨의 간특한 이성과 모순적 감성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은이가 격주간 신문 < Dog's Life >의 인터뷰 연재를 통해 15명의 명사와 함께 사는 개들의 사연을 다룬 사진 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은 그러한 관계를 덤덤하고 심심하게 그린 책입니다. 개를 개로서 이해하는 사람이 개와 더불어 어찌 살아가는지를 서너개의 단색으로 채색한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정보가 꼼꼼하거나 사색이 풍성한 편은 아니지만 대신 견주와 애견의 닮은꼴 흑백 사진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책을 읽다보면 소설가 이외수씨는 잡견인 복코, 멍구, 뭉크와 함께 춘천에서 살고, 작고한 시인 천상병씨는 완전히 똥개인 똘똘이와 복실이랑 뒹굴며 살았으며, 가수 이남이씨는 대령산 기슭에서 진돗개 호순이랑 벗하며 살고 있는 장면을 한데 모아 상상할 수 있지요. 또한 견주의 애견 작명에도 남다른 이미지가 덮씌워져 재미있는 연상을 하게 만듭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흙을 밝고 다닐 땅이 있고 풀어놓아 자유로이 나다니며 원할 때 누구든 먼저 다가가서 애정을 나눈다는 점이 아닐까 싶네요. 아예 진돗개 농장이나 풍산개 농장을 차려놓고 혈통 보존과 보급에 심혈을 기울이는 책 속의 또 다른 주인공들은 넓은 우리를 만들어 개들끼리 무리지어 살도록 하기도 하지만요.

인간 혐오와 동물 사랑이 함께 결합된 상태는 대단히 나쁜 상태인 것이다.

콘라드 로렌츠의 <인간은 어떻게 개와 친구가 되었는가>에 나오는 이 구절은 개를 개로서 사랑하는 일이 사람을 사람으로서 성찰하는 일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줍니다. 지은이가 만난 견주와 애견의 평화로운 풍경이란 것도 필시 서로의 차이를 깊게 이해함으로써 연출되는 자연스러운 관계의 기술이겠지요. 결점과 결핍을 채우기 위한 대용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 경지라면 사람과 개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선명하게 경계짓는 일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하겠더군요. 단지 다를 뿐이지요. 그래서 함께 사는 것이고요. 이렇듯 휴머니즘 외부에 눈을 뜨는 사람이라면 도기즘(Dogism) 외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맑은 눈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곳이 바로 개를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 개의 마음을 빌려 사람을 되돌아보는 특별한 관계의 좌표일 테니까요.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사상가 루쉰조차 내킨 김에 쓴 말이라고 토를 달긴 했지만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는 비유를 통해 여기에 붙고 저기에 붙는 기회주의적 세력을 개에 빗댄 적이 있습니다. 개를 개로서 이해하지 못한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지요. 휴머니즘 내부에서 바라본 개의 이미지는 종종 그렇지요.

'개판, 개새끼, 개 같은' 욕설이 고스란히 뒤집혀서 '사람판, 사람새끼, 사람 같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 중심을 벗어나면 개와 비교되는 사람의 못난 점들이 얼마나 크게 보일까요. 지평이 달라지면 안 보이던 것이 너무나 잘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너그럽게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비교적 개보다 못한 것이 틀림없으니 차라리 덜 된 개를 가리켜 '사람만도 못한 개'라고 비유하여 말하는 것이 편리할 듯하다.

책 말미에 지은이가 불쑥 꺼내는 이 말은 제대로 된 동물에게는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통찰이랍니다. 다음 생애에 개로 환생하는 것을 이승에서 쌓은 부덕의 귀결로 보는 인간적인 사고도 이참에 바꾸는 게 낫지 싶네요.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 People & Dog

김선영 지음,
바다가보이는교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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