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있는책
누구라서 그런 시절이 없었을까? 균형 잡힌 예쁜 가슴과 날씬한 허리, 거기에 수술을 했건 말았던 커다랗고 촉촉한 눈망울의 여성을 동경하던 시절.
결국 지금의 서른 셋 사내를 키운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잔망스런 꿈이었다. 그 아름다움이 피조된 것이건, 자의에 의해 변조된 것이건. 각설하고, 우리는 예쁜 여자가 좋았다.
하지만 그 '예쁜 여자'라는 조작된 관념이 싸구려 유리그릇보다 더 깨어지기 쉬운 헛된 바람임을 알기까지의 시간은 짧았다. 벗은 여자의 육체는 아름다웠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그 아름다움이란 가난한 기자에겐 필경 붙잡을 수 없는 피상적인 관념. 간명하고도 복잡다단한 그 진리를 알아가며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화가 신해숙에 의해 최근 출간된 에세이 <누드로 사는 여자>(느낌이있는책)는 '벗은 여자의 몸'이 욕망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 작가의 손에서 묘사된 수많은 여성들의 벗은 몸은, 한 시절 우리가 꿈꾸어 가 닿고자 했던 가파른 추억의 편린으로 읽힌다. 퍼렇게 멍든 작은 가슴과 생산의 수단임을 포기한 축처진 엉덩이.
육척 장신의 아들 둘을 생산했으면서도 그 생산의 주체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기자의 엄마. 불꺼진 어두운 방.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의 대상인 늙은 엄마와 아들. 그 앞에서도 제 할 말을 다 못하고 살아온, 아니 앞으로 못하고 살아갈 그녀.
어느 한 때 "오늘은 이야기하다가 내 방에서 잘래"라는 말을 하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지청구만 먹던 그녀. 내 엄마.
신해숙의 책 <누드로 사는 여자>에서 수십 점의 누드 이상으로 독자들을 매혹하는 힘은 그녀의 솔직한 글이다.
멀리 외국에서 살다온 아들을 위해 안방에 가족 모두가 잘 수 있는 큰 침대를 마련하고, "우리 저 침대에서 가족이 모두 함께 자자"라고 말할 수 있는 엄마스러움(?). 어찌 보면 엄살 같은 그녀의 문장을 읽으며 기자의 눈가가 뜨거워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한번 욕망의 핏대를 세워 신해숙이 그린 벌거벗은 몸의 여자를 본다. 그러나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봐도 거기에선 저급한 욕망, 그 한 조각도 읽히지가 않는다. 안마시술소와 룸살롱, 붉은빛 네온 등이 유혹하는 청량리와 미아리라면 사족을 못쓰는 기자로선 신통한 일이다. 무슨 이유일까? 혹, 신해숙의 누드에서 엄마를 본 탓?
공자는 어떻게 살았나?
- 이인호의 <논어 30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