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에 대한 기억과 이 시대가 잃어버린 것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록 2003.06.07 08:22수정 2003.06.0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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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아" 라고 소리내어 말을 하니 신맛이 입안에 가득 고이는 것 같다. 숭애, 넓은잎싱아라고도 불리는 싱아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다. 산골에서 자란 나도 싱아 줄기를 자근자근 씹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정겨운 고향의 맛, 시골에서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자라온 이들에겐 어디 싱아 뿐이랴. 지천으로 널린 온갖 자연에서 얻어지던 먹을거리, 자연의 맛 그대로를 즐기며 자란 까마득한 유년시절, 그 시절을 이야기 할 때면 그만 가슴이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 흥건히 젖어들곤 한다.


그런데 과연 지금도 고향의 산과 들엔 그때 즐겼던 온갖 먹을거리들이 그대로 있을까? 아니 그 맛이 날까? 난 가끔 동네 저수지에서 동무들과 뽑아 먹었던 삐비 생각이 간절해지곤 한다. 그리고 풋보리를 한입 가득 넣고는 껌을 만든다고 잘근잘근 씹던 생각도 풋풋하다.

또 살이 도톰하던 칙뿌리를 캐어 먹고 시커멓게 된 입으로 온 산을 뛰어다니던 시절이 떠올라서 웃음이 난다. 그 시절들을 지금 생각해보면 한 폭의 수채화 같기만 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장에 대한 기억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 속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그 시절을 생각하면 황혼이 짙게 깔리던 저녁하늘이 다가오고 바람에 대나무 잎이 쓸리는 소리, 사립문 덜컹대던 소리들이 파도처럼 가슴속으로 메아리 져오는 것이다.

먹을 것을 찾아서 산과 들로 쏘다니며 가난함과 궁핍함이 곧 생활이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이제는 그때와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살지만 가끔 꿈을 꾸듯 회상에 젖으면 생명수 마냥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단비 같은 것이 아닐까?

작가 박완서의 소설은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휴머니즘적인 요소가 짙다. 다른 작가들의 성장소설을 여러 번 접했지만 이 책은 조금 특별한데가 있다. 기억에 의존한 글쓰기, 기억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변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러나 기억의 근본은 언제나 한곳에 머물러 있으리라 생각한다. 성장소설 속에는 한사람의 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지만 이 책은 군더더기가 없음이 좋다. 미화되지 않는 애써 수식을 지양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므로 쉽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박완서님은 칠십의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억만을 의존하여 아름답고도 치열한 삶을 풀어놓았다. 혈연들과의 유대관계나 할아버지에 대한 남다른 정은 매우 특별하였다. 집안의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엄마의 미래지향적인 생각은 엄격한 집안의 계율을 벗어나 신세계를 개척하듯 거침이 없다.


작가의 엄마에 대한 기억은 복잡 미묘하다. 이 책은 시종일관 모녀의 대결의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거부하면서 그런 자신과 어머니에 대해서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고 어머니를 지겨워하지만 또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일제와 6.25를 겪으면서 시대에 따라서 변해 가는 가족 사, 공산주의에 물든 오빠로 말미암아 집안이 풍비박산된 6.25의 와중에서 좌익으로 몰려 살았던 치욕적인 삶을 작가는 벌레로 표현한다. 작가가 숭배해마지 않았던 오빠, 그러나 너무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가족의 고난은 가중되었고 작가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생채기가 되었다.

6.25를 전후해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하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많을 것이다. 오로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삶, 말로 풀어내기 힘든 그 생활들을 과연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간접적인 경험은 때로는 자기위안일 뿐이다.

서울대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김윤식씨는 박완서 작가를 '소설의 거인' 이라고 하셨다. 작가가 개성 박적골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써 내려간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글을 애써 다듬지 않았음에도 그처럼 가슴이 절절하건 마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불멸의 고향이 거기 있음이 아닐까.

나 자신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힘들었고 고생스러웠던 기억이 훨씬 많지만 그런 기억들에 앞서 생각나는 건 산과 들에 파묻혀 있는 고향의 풍경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흙을 닮은 사람들이 살고있었던 아주 오래 전 그 시절, 사람이 있고, 자연이 있고,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그 시절이 간절한 정겨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세월은 흘러가지만 언제나 의외로 기억은 새롭다.

박완서의 책들을 많이 좋아한다. 그 분의 책을 빼놓지 않고 읽는 이유, 그건 책 속에 들어있는 온갖 이야기들이 현실 속의 삶의 모습, 바로 현실이 깊게 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문고에 있다보면 박완서님의 책을 찾는 이들이 많다. 그 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작가가 좋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박완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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