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교수(고려대)는 최근 인터뷰에서 "내부문제는 안 보고 ‘정부 탓’하는 재벌과 국내문제는 안 보고 ‘외국자본 탓’하는 극좌가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참여사회 인터넷판
하지만 재벌만이 스스로의 덫에 빠진 것이 아니다. 그간 골리앗에 맞선 다윗으로 국민적 칭송을 받아온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역시 이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안연대는 주주가치 원칙에 입각한 재벌개혁 방식이 그 유효성의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번 SK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재벌은 국내시장에서의 강력한 지위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지배권 방어에 있어 매우 취약하며, 현행 재벌개혁 방식을 일거에 추진할 경우 모든 재벌이 월스트리트에 바겐 세일되고 마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더 이상 장하성 교수처럼 ‘개방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지배권 방어를 들고 나오는 게 왠말이냐’는 식으로 시비를 한다거나, ‘기업지배권 싸움으로 주가가 오르면 다른 주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한가하게 발언할 때가 아니다. 이는 한국경제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비중 있는 학자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외국자본, 특히 막대한 자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단기간 내에 재무적 초과이윤을 추구하는 외국펀드는 어떤 대기업이건 취약점이 노출되면 즉각 지배권 장악을 시도하거나 이를 빌미로 여유 현금흐름을 탈취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99년도 SK텔레콤을 그린메일과 유사한 전략으로 공략한 타이거펀드의 사례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설혹 외국자본이 반도체산업, 석유산업, 통신사업과 같이 본업에 관심을 갖는 전략적 투자자라 할 지라도, 이들을 상대로 한국경제에 도움이 되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 기술력 강화와 같은 최소한의 국민경제적 책임을 요구할 명분도 없고 수단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대기업의 지배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다른 주체가 국내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뛰어들어 국유화를 단행할 수도 없고, 은행이 소유의 중심에 나설 수도 없고, 종업원 지배가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참여연대가 추종하는 주주가치 논리에는 더 근본적인 함정이 있다. 이를 맹종할 경우 기업의 중장기 투자를 가로막아 국민경제의 지속적 성장이 제약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이 왜 주주가치 극대화 논리에 빠져들었고 그 사회경제적 귀결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분명해진다.
미국은 1970년대를 전후해 자국의 산업자본이 기울면서 금융주도형 경제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하고자 극단적인 형태의 시장주의와 주주가치 극대화 논리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은 군수산업이나 첨단 벤처산업 외에는 이렇다할 산업경쟁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가진 자와 소수 능력있는 자만이 부를 증식할 수 있는 왜곡된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대기업들은 경상이익의 60~70% 정도를 주주 배당금으로 지급하거나 주가관리, 자사주식 매입에 사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차입금 이자비용, 최고경영자 스톡옵션 지급 등을 가산한다면, 사실상 미국 대기업들이 창출하는 이익의 대부분은 금융-주식자본의 수익보장에 투입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경쟁력, 산업경쟁력을 지속적으로 높이려면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이를 위한 <내부유보-재투자>의 메커니즘이 붕괴되고 만 것이다. 즉 미국의 대기업들은 주주를 위해 ‘주주가치’는 높이고 있을지 몰라도 ‘기업가치’의 장기적 향상에는 실패하고 있다.
재벌 총수는 응징하되, 기업지배권은 국내에서 지켜내야
반면 한국경제는 아직도 굴뚝 산업형 대규모 제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최소한 20년 동안은 금융업보다는 제조업에 의존해서 생존과 발전을 계속해야 한다.
동시에 저임금 저비용을 무기로 한 중국의 추격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제조업 분야에 대규모 혁신 투자가 지속되어야 하며, 이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을 기반으로 점진적으로 첨단 기술 산업과 물류 금융 관광 등 국제서비스업을 개척함으로써 동북아 경제중심국 구상에 어울리는 산업구조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경제가 성급하게 금융주도형 경제의 논리인 주주가치 이념에 빠져드는 것을 심각하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재벌연구는 재벌에 대한 가치중립적 연구를 지향했다기 보다는 재벌을 악의 축 내지는 문제집단으로 기정사실화한 위에서 그 문제점 고발 차원의 연구, 혹은 문제점을 어떻게 시정할 것인가에 관한 정책적 기술적(technical) 연구에 머물러왔다.
그러나 경제 발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재벌은 세계역사상 유례없이 성공적인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며, 이들이 키워온 우수한 역량은 해체 파괴할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도 국민경제의 성장엔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겨야 한다.
따라서 지난 40년간 종업원과 기술자와 경영자들의 땀과 희생의 노고 위에 키워온 인적 조직적 기술적 역량을 대책없이 외국자본의 지배권 하에 넘기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이를 잘 보존하여 우리 경제와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더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외면하고 범 진보진영 내에서 이념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칫 창조는 없고 파괴뿐인 재벌개혁으로 귀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