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각나는 '딸기'

"수다쟁이 아줌마, 좋은 데로 잘 가"

등록 2003.04.02 13:48수정 2003.04.0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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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장모님과 전화 통화를 끝낸 아내가 마치 지나가는 말이란 듯이 한 마디 툭 내던졌다.
"오빠 약 해 줄려고 딸기 잡았다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아내의 얼굴엔 내 반응이 어떨까라는 관심도 묻어 있었다. 난 순간 망치로 맞은 것 같았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음... 그래..."라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여기에 등장한 주인공 '딸기'는 우리가 흔히 보는 '개'과의 동물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녀석의 하는 폼이 그 이름과 썩 어울려서다. 어린 아이가 저도 모르게 그냥 "넌 앞으로 딸기야"한 것이 녀석의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인데 그게 금상첨화였다.

내가 아내의 집에 처음으로 간 것이 2001년 5월 5일이었다. 앞서 오는 더위에 조금은 걱정 반, 두려움 반, 설렘 반 등이 뒤섞인 채 도착했다. 그 때 제일 먼저 안심시켜 준 이가 딸기였다. 때가 덕지덕지 낀 털을 앞발로 쓰다듬으며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낯선 놈이 우리 집엔 웬 일이야?" 라며 말을 건넸다. "휴, 넌 누구니?" 다가가도 저도 졸리운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차피 만남이란 사람과 사람만이 가지는 특권은 아니기에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딸기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나 또한 유난히 개를 좋아도 하지만 이 녀석의 낯간지러운 애교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폼이 숫놈은 아니요, 그렇다고 암내를 아무렇게나 풍기는 지조없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 때는 짖지 않았던 '여우'가 모르는 이가 조금이라도 얼굴을 비치면 '접근 금지'라며 큰 소리로 울어대니, 그 녀석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딸기와의 만남의 절정은 다음 해인 2002년이었다. 처가댁이 의성군 점곡면 송내1리에서 사과밭을 하고 있어 작년 4월부터 일손을 도와드린다는 명분으로 자주 찾게 되었다.

한 번은 딸기와, 놓은 지 얼마 안 된 새끼를 데리고 밭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 후 딸기는 차만 움직이면 자기가 먼저 냅다 밭으로 뛰어 가곤 했다. 장인어른도 딸기 뿐만 아니라 대형견을 따로 두 마리나 더 키울 정도로 개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사과밭으로 행차하는 딸기의 모습을 즐기곤 하셨다.


여름엔 같이 물에도 들어가 볼 정도였다. 하여튼 작년은 송내리, 그 작은 동네에 딸기의 흔적이 안 묻어난 곳이 없었다. 그러다 늦은 가을 무렵, 딸기는 또 키 작은 못난이와 눈이 맞아 임신. 그 땐 어찌나 몸이 무겁든지 자기는 반가워 뛴다고 하는 폼이 땅에서 10cm도 발을 올리지 못했다.

11월 중순에 9마리의 새끼를 놓고 딸기는 다시 동네 순찰에 나섰다. 홍시가 툭, 툭 떨어지더니 이내 송내 강변의 물이 얼어 붙었다. 아내와 난 의성에 갈 때 거의 안동에 있는 형님 아이들(승은이, 태혁이)을 같이 데려갔었다.

어느 날 장인어른께서 아이들에게 손수 썰매를 만들어 주셨다. 제법 추운 날, 우린 "룰루랄라"하며 썰매를 지쳤고, 딸기도 태혁이가 깨는 얼음조각을 먹는다고 정신 없었다.

그 날이 딸기와 놀았던 마지막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2003년 설 인사 드리고 온 후 2주에 한 번 꼴로 찾게 되고, "딸기야, 새끼 잘 키우고 있어."


"기분 안 좋지?" 아내의 말.
"휴, 정말 딸기 잡았어!" 나의 어눌한 독백, 괜히 별 것 아닌 것처럼 웃으며 아내에게 몇 번이나 이 말을 되풀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의성으로 발걸음을 떼기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건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겉으로는 비치지 않았지만 장모님의 "당신도 약 드실래요?"란 말에 "내가 키우던 거라 먹기 싫어"라고 딸기에 대한 그리운 속내를 비치기도 하셨다.

꽤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아내가 사진을 찾아 왔다고 보라 했다. 사진 속엔 우리의 모습과 태혁이, 승은이의 귀여운 얼굴이 작년 가을부터 송내 겨울 강변까지 시간을 아우르며 보였다. 그러다 내 눈길이 멈추었다. 정면은 아니지만 딸기가 교태 넘치는 꼬리를 뒤로 한 채 사진 한 컷에 스며 있었다.

'고통스러웠겠지... 원망도 많이 했을 테고, 좋은 데 가야 하는데!'

지난달 마지막 주에 갔다 왔다. 딸기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 주었다. 지어미를 닮아서인지 더 더럽게 해 다닌다. 그 놈도 암캐다. 땅에 바짝 엎드려 나를 바라 봤다.

장인어른과 난 이 녀석의 이름을 '딸기'로 하는 것에 묵시적 합의를 해 놓았다. 그래서 딸기는 여전히 송내리 넓은 동네는 아니지만 집 좁은 마당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돌아 다닌다.

'올해는 이 녀석과 물놀이 가야 겠다.'

조금 있으면 본격적으로 또 사과밭이 술렁일거다. 그 때 딸기도 한 켠에서 뛰어 다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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