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실상사의 추모 발원문 | | | | 고 심미선, 신효순, 두 소녀의 영가를 보내며 삼가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우러러 고하고 발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한 찰나도 쉬지 않고 변합니다. 생겨난 것은 그 무엇이건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태어난 이상 죽어야 하는 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어떤 생명은 태어나 단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혹은 바깥 세상 빛 한 줄기, 바람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딴 세상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서로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는 것, 그것이 그나마 우리네 중생들의 슬기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미 여섯 달이 지난 저기 저 미선, 효순 두 소녀의 황당한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참담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열 네 살, 저 풀잎처럼 여린 것들 풀섶에서 뛰는 개구리나 메뚜기를 보고도 소름이 돋았을 새털 같이 보드란 팔다리가 파란 꿈과 사랑을 담은 심장과 뼈마디가 그 무시무시한 장갑차의 괘도에 짓이겨질 때, 이슬 냄새 나는 정갈한 머리카락 강철 나사못에 엉겨 뽑힐 때, 저 아이들이 겪었을 아픔과 절망의 벼랑!
아, 6월 13일 오전 11시, 그 대낮의 하얀 절망, 깜깜한 어둠을 상상하면, 대자대비 관세음 보살님! 당신의 그 온화한 미소보다 의로운 벼락칼의 응징을 빌고 싶어지는 이 중생심을 용서하소서! 대지 문수사리 보살님! 오늘은 왠지 당신의 명철한 지혜를 기리기 전에 얼음보다 차가운 저주가 혀끝에 맴돕니다. 우리의 이 분노는 비단 처참하게 바스러진 저들의 주검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한 사고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아직 붙어있는 이 목숨이 무겁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남에 나라 군대가 그 흉물스런 괴물들을 함부로 몰고 다니는 꼴을 눈뜨고 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직 무엇 하나 바로잡지 못하고 뭐 하나 달라지지 않았는데, 우리 입으로 저 상처받은 넋들을 향해 훌훌 털고 일어나라는 말 차마 떼기 어렵습니다. 하오나, 오늘 이 법석을 채우신 제불 보살님, 경황도 없이 부서진 저들의 꿈과 놀란 가슴 쓸어주시고, 저들을 사랑했던 어르신들 동무들 에게도 안심을 주소서! 대성 인로왕보살님, 삼세 제불 보살님들의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으로 원망과 회한 씻어내어 더욱 정갈해진 미선이, 효순이의 영가 한없는 빛의 세계, 아미타 부처님의 불국토로 인도하소서!
미선아, 효순아 이제 이 세상일은 우리에게 두고, 부디 인로왕보살님 이끄시는 대로 맑디맑은 빛의 나라, 더 이상 태어남도 없어 죽음도 없는 나라, 톱니바퀴 갈리는 소리도 총도 없는 나라, 학교도 과외수업도 없는 나라, 주눅들 일도 뻐길 일도 없는 나라, 꾸지람도 칭찬도 따돌림도 없는 나라, 미워할 것도 매달릴 것도 없는 나라로 가거라! 너희들의 예쁜 이름 「미선」, 「효순」은 배달의 자존을 일깨우는 수호천사로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법석에 강림하신 제불 보살님, 여기 동참한 우리 대중 비록 수 적고 목소리 크지 않으나 부처님 법의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미국 정부, 평등과 평화, 자유를 갈망하는 온 세계 자유시민들과 한국 언론에 준엄하게 요구합니다. 1. 한·미 두 나라는 당장 「주둔군 지위 협정」을 사리에 맞게 개정하라. 우리 나라가 진정한 주권국이라면, 우리 땅에 들어와 있는 외국 군대는 우리의 국익을 위한 장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만 방자한 점령군이 아닙니다. 1. 전 세계의 자유시민들이여, 제국주의적 침탈 전쟁을 온몸으로 거부하라. 우리는 기름때와 화약냄새로 찌든 왕관을 쓰고, 뒤틀린 잣대로 남의 내정을 간섭하며, 제멋대로 악의 축이라는 딱지를 붙여대는 미국의 제왕적 오만과 횡포의 뿌리가 이기적인 자원 착취와 제품 시장 확장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 언론은 왜곡과 어설픈 훈계를 중지하고 사실 보도에 충실하라.
“무명 속에 만년을 사느니 지혜롭게 하루를 사는 게 낫다!”고 가르치신 시방 삼세 제불 보살님께 다시 간절히 빕니다. 세상 모든 중생들 단 하루 단 한 찰나라도 밖으로만 향했던 손가락질 제 안쪽으로 되돌리게 하소서! 남의 눈물 위에 세운 기쁨은 진정 행복이 아닙니다. 오늘 자신의 안락과 행복이 다른 중생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살피게 하소서! 하루 단 한 번이라도 닫힌 가슴 열어 나 아닌 중생들의 슬픔과 외로움에 귀 기울이고 보듬어 안게 하소서! 끝으로 비옵나니, 구천에 떠도는 서러운 넋들 남김없이 불생불멸, 적멸의 땅으로 인도하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기 2546년 12월 12일 지리산 실상사 사부대중 / 금강경 결제 동참 대중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