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있는 한 운명은 없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임레 케르테스 대표작 <운명> 나와

등록 2002.12.02 19:25수정 2002.12.0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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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표지
<운명> 표지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운명이란 무엇인가? 사전에 나오는 '운명'은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고 생각할 때, 그 지배를 하는 필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 힘에 의해 신상에 닥치는 여러 가지 길흉화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어느 정도의 틀이 있어서 그 누구도 그 운명이란 틀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운명도 스스로의 극복의지에 의해서 바꾸어 낼 수도 있는 그런 것이란 말인가.

만약 인간이나 삼라만상이 그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서 지배받는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또한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떠한 운명속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까. 또한 어떠한 운명이 과연 제대로 된 가장 잘 헤쳐낸 인간의 운명일까.

'자유가 있는 한 운명은 없다'고 우리에게 툭 던지는 임레 케르테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탈피하고 해방하는 길은 '자유'뿐이라는 것이다. 자유, 그런데 그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누려야 하는 것인가. 운명이 있는 한 자유는 없다?

2002 노벨문학상을 받은 헝가리의 작가 임레 케르테스(73)의 대표작 <운명>(다른우리, 9500원)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박종대, 모명숙이 번역하고 한경민이 감수한 <운명>의 원제는 '운명없음'을 뜻하는 헝가리어로 '소르슈탈란사그(Sorstalansag)'.

<운명>은 1975년 케르테스가 마흔 다섯에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이 작품은 케르테스가 무려 12년을 다듬은 역작 중의 역작으로 1988년 펴낸 두번째 소설 <실패>와 1990년에 발표한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송가> 등과 함께 3부작의 첫 권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20세기 유럽인이 겪은 가장 큰 비극인 독일군의 파시즘을 고발하는 1인칭 소설 <운명>은 당시 사회의 모순의 극점, 다시 말하면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로 결론지어지는 그 엇나간, 어쩌면 엇나가서 행복한 그 운명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15세 소년 죄르지의 시선을 통해 아우슈비츠에 강제수용되었던 작가 자신의 실제 체험들을 이야기한다. 또 파쇼에 의해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그런 절박한 운명 속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운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작가 케르테스 스스로 체험한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의 헝가리는 독일군에 의해 이미 점령된 상태다. 그와 더불어 헝가리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수많은 유태인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보내지는 15세 소년 죄르지. 죄르지는 가축 운반용 화물열차에 실려 가게 되는 그 길을 마치 보이스카웃이 모험하는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인다. 수용소에 도착한 죄르지는 꽤 쓸만한 일꾼으로 분류되어 다시 부헨발트로 보내진다.

죄르지는 계속해서 단계적으로 강제수용소에서의 일상생활을 체험한다. 짜이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몇 개월을 보낸 죄르지는 병에 걸려서 다시 부헨발트로 보내지고, 이곳에서 죄르지는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연합군의 입성으로 수용소가 해방되면서 1년 간의 강렬한 순간들을 체험한 죄르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죄르지는 말한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그 말이다. 이처럼 주인공 죄르지가 생각하는 행복의 의미는 아주 독특하다.

어떤 사람이 하루종일 힘겨운 노동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또 하루종일 굶은 사람이 따뜻한 수프 냄새를 맡으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심한 부상을 입게 되어 채석장에서 힘겨운 노동에 시달릴 필요도 없이 병원에서 간호를 받게 되었다면, 그것 또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을 분노의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그 사건을 말하고, 그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는데 있다. 케르테스는 죄르지를 통해 아무리 극한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어떠한 의미나 가치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늘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충실하게 적응해 나가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면 뭔가 답답하면서도 불편하다. 주인공인 15세 소년 죄르지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아니, 있는 현실을 잔머리 굴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 꼬집어도 '아야' 소리 한번 하지 않는, 아예 감정이 없는 아이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서 극한 상황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안나 마리아가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팔은 내 목을 감쌌고, 얼굴은 내 어깨를 눌렀다. 그 다음에는 내가 안나마리아의 입술을 찾았다는 것만이 기억난다. 옅은 열기가 있고 촉촉하며 약간 끈끈하기까지 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것은 내가 소녀와 나눈 첫 키스였고, 게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다시 키스했다. 그때 나는 키스를 더욱 깊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깨우쳤다. 이럴 때 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임레 케르테스는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된다. 1948년에는 부다페스트 신문 〈빌라고사그〉에 취직했으나 1951년에 해고 당한다. 지은 책으로는 <운명>(1975) <길을 발견한 사람>(1977)  <실패>(1988)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송가>(1990) <문화로서의 홀로코스트>(1993) 등이 있다. 1995년 브란덴부르크 문학상, 1997년 라이프치히 서적상 수상.

덧붙이는 글 임레 케르테스는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된다. 1948년에는 부다페스트 신문 〈빌라고사그〉에 취직했으나 1951년에 해고 당한다. 지은 책으로는 <운명>(1975) <길을 발견한 사람>(1977)  <실패>(1988)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송가>(1990) <문화로서의 홀로코스트>(1993) 등이 있다. 1995년 브란덴부르크 문학상, 1997년 라이프치히 서적상 수상.

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민음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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