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록 2002.06.10 12:49수정 2002.06.1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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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직도 쫓기고 있었다…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 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번 주 영풍문고 베스터 4위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닷컴, 7000원)>는 작가의 유년기부터 스무 살까지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속에는 1930년대 개성에서 태어난 작가의 철부지 소녀 시절부터 20대까지, 그러니까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기억이 깡그리 숨겨져 있다. 이 소설 속에는 시큼한 싱아를 따먹으며 인상을 찌푸리던 소녀의 성장기와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자행되어진 분단의 상처가 흑백의 활동사진으로 다가오고 있다.

"독립문까지 빤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그동안 발표된, 또한 펴낸 작품집마다 대부분 베스터셀러가 된 작가 박완서 문학의 뿌리이자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박완서의 여러 작품 속에 자주 나오는 자전적 요소들, 즉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그 많던 싱아는...)라는 이러한 투의 자전적 사고가 어떠한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형식으로 드러나는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조끔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 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 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 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그동안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작가 박완서의 가족관계, 작가를 낳고 길러준 어머니와 작가 자신의 심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 1930년대 개성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상이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분단으로 묻혀버린 개성의 역사와 풍습, 산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학적인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홍정선은 "소설의 경우 개인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솔직하게 고백하기가 쉽지 않다" 며 "그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을 완전하게 드러낸 작가의 용기를 높이 사고 있다"고 작품해설에서 밝혔다.

싱아... 싱아는 우리나라 전역의 산기슭 초원에서 자라는 풀로 지금부터 8월까지 흰색의 꽃을 피우는 여러 해 살이 풀이다. 높이는 1m 안팎으로 곧게 서고 가지가 많이 갈라지며, 봄과 초여름에 연한 잎과 줄기를 삶아 나물로 먹는다.

작가 박완서가 이 소설 속에서 아카시아 꽃을 많이 따 먹으면 비위가 상하는데, 그 비위를 달래는데 그만인 것이 싱아였다고 밝히고 있듯이, 싱아는 싹을 따서 날로 먹거나 즙을 내서 먹는데, 맛이 새콤하기 때문에 특히 어린이들이 먹기에 좋다고 한다.


작가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 '나목'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주요작품으로 '엄마의 말뚝' '나목' '미망' '휘청거리는 오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수많은 작품집을 펴냈으며,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번주 영풍문고 베스터셀러 1위는 KBS 한국방송에서 펴낸 'TV동화 행복한 세상'(샘터사, 9000원)이 차지했다. 2위는 신경림 시인의 '시인을찾아서'(우리교육, 8000원)가, 3위는 존그레이가 쓴 수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친구미디어, 9000원)가 차지했으며, 5위는 가스통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문학세계사, 9200원)이 차지했다.

이어 6위는 '펄떡이는 물고기처럼(한언, 8900원), 7위는 F.스콧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책만드는집, 8000원), 8위는 스콧버거슨의 수필 '발칙한 한국학'(이끌리오, 1만원), 9위는 백선경 장편소설 '이제 나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징검다리, 7800원), 10위는 이철환의 '연탄길(삼진기획, 7500원) 순이다.

교보문고는 여전히 신경림 시인의 '시인을 찾아서'가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KBS한국방송에서 펴낸 'TV동화 행복한 세상'이 2위를, 가스통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박완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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