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기적'을 고대한다

등록 2000.06.14 11:48수정 2000.06.1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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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김대중대통령의 출발 성명 마지막 문장이다. 어째서 ‘다녀오겠습니다’가 아니고 ‘안녕히 계십시오’였을까? ‘길 떠나는 대통령’을 숱하게 보았지만 이렇게 마치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오르는 듯한 비장한 작별 인사는 처음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단 한번도 대통령의 출국 행사 중계방송을 눈여겨본 적이 없는 내가 이번에는 대통령 전용기가 북녘 하늘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상 만사에 언제나 냉정한 비판적 시선을 던지는 것이 시사평론가의 ‘직업병’이건만, 어느새 콧날이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든 것을 보면 나는 아직 이 고약스러운 ‘직업병’에 걸리지 않은 얼치기 평론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7000만 겨레의 운명이 걸린 대통령의 평양행인데, 잠시 냉정함을 잃는다고 해서 무슨 흠이 되겠는가.

김 대통령 일행은 반세기 전 백범 김구 선생이 걸어서 갔던 길을, 이데올로기의 광풍에 휘말려 전쟁터로 내몰렸던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피 흘리며 오고갔던 한 맺힌 길을, 수많은 이산 1세대 노인들이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오매불망 꿈에도 그렸을 그 길을 단숨에 날아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맞섰던 북한의 최고 지도자와 굳게 손을 잡았다.

이제 곧 자동차로 그 길을 되밟아 올 김 대통령은 과연 무엇을 가지고 올 것인가? 이산가족 상봉에서부터 경제 협력과 월드컵 단일팀 구성, 군사 정치적 화해 조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저마다의 소망을 안고 대통령의 귀환을 기다릴 것이다.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지나친 기대를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구체적인 성과가 없이 빈손으로 돌아와도, 대한민국 대통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 땅을 밟은 다음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위대한 역사를 이뤘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일단 커다란 기대를 걸어 보고 싶다. 슬픈 작별이 기다릴지 모른다고 해서 아름다운 만남을 기피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나는 사람 사이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는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의 일이지만 그것을 평화로 전환시키는 것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다. 2000년 6월 13일 오전에 두 정상이 뜨겁게 손을 맞잡을 것이라고,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가면서 대화를 나누리라고, 그 어떤 전문가가 상상이나 했으랴.


지난 세기 우리는 ‘평화의 기적’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자 아라파트는 제각기 내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서로를 인정하는 평화협정을 성사시킴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중동전쟁을 종식시켰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지도자 넬슨 만델라와 드 클레르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남아공의 수백년 묵은 인종차별과 흑백 내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어째서 한반도라고 해서 이런 ‘평화의 기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백화원 영빈관에서 서울과 평양의 좋은 날씨를 거론하며 회담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넌지시 피력한 김 대통령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렇게 한마디를 던졌다. “걱정 마십시오.” 비록 의례적인 인사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한마디에 희망을 걸고 싶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평화공존이라고 믿는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잡아먹는’ 방식의 통일을 양측 모두 원하지 않는다면 통일은 평화공존이 이뤄진 다음에야 비로소 현실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 협력, 군축 등 구체적인 현안을 해결하는데는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칼을 녹여서 보습을 만들자는 평화선언은 두 정상의 의지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으며 비용도 들지 않는다.

향후 어떤 이해관계의 갈등이나 돌발 사태가 발생할지라도 상대방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방과 군사적 도발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함께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한반도의 정세는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두 정상의 ‘한반도 평화선언’을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동아일보 6월 13일자 <유시민의 세상읽기>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동아일보 6월 13일자 <유시민의 세상읽기>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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