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와 <사평역에서>

시적 진실과 삶의 진실에 대해

등록 2000.05.04 13:24수정 2000.05.0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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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雪原)인데
단풍잎 같은 몇 닢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 톱밥의 불꽃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1981.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 감상노트

아직까지도, 오늘날의 신춘문예는 문학에의 열병을 앓고 있는 문학청년들로 하여금 몸살을 앓게 하는 초겨울의 연중 행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뭇 국가고시보다도 신춘문예의 다른 장르보다도 특히 더 어려운 시부문에 있어서 신춘문예를 통하여 등단한 시인들이 그 후에도 치열하게 시를 쓰고, 시를 살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곽재구는 분명, 그 몇 안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광주에 살면서도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작은 포구나 한가한 간이역, 그런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

시골의 작은 간이역을 떠올리게 하는, 실재하지도 않는 <사평역에서>는 우리나라의 시문학사에 길이길이 남을 아주 빼어난 작품이다.


심사평에서도 약간 언급했듯이, 그가 이 시에서 언어를 다루는 솜씨는
마치 훌륭한 조각가가 빚어낸 조각품처럼 정교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러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시적인 기량과 시적인 진실 못지않게
삶의 진실이 절로 우러나오는 감동을 받는다. 그런 것이, 곽재구의 장점이요, 특기이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작자 자신도 모른 채, 현란한 언어구사만을 해대며, 일명 포스트모던하다고 떠들어대는 작자들과 평론가 답지 않은 평론가들이 많은 오늘날의 한국현실에서 그의 존재는 길이길이 남을 만하다.

평론가와 독자, 동료 시인들에게서 동시에 인정받는 시를 쓰기는 영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 시인을 만나고 싶다. 그가, 집이 있는 광주가 아닌, 어느 이름없는 조그만 간이역이나 작은 포구를 여전히 떠돌고 있을지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그만의 시의 향기가 오롯이 피어나는 곳에 그는 있을 것이다.

- 金活

★ 그의 책들

* 받들어 꽃 / 미래사 / 4,500원
* 사평역에서 / 창작과 비평사 / 5,000원
* 삶을 흔들리게 하는 것들 / 동방미디어 / 6,500원
* 서울 세노야 / 문학과 지성사 / 4,000원
* 아기참새 찌꾸 / 국민서관 / 8,500원
* 참 맑은 물살 / 창작과 비평사 / 4,000원
* 초원의 찌꾸 / 한양출판 / 8,500원

덧붙이는 글 | *김활(金活)은 본인의 필명입니다.

덧붙이는 글 *김활(金活)은 본인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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