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진,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 (2017)
백현진
나는 이 시점에서 이 시대의 미술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화 하자면 <올해의 작가상>의 작품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의 '어떻게'에 관한 태도를 가시적으로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의 '무엇'을 보면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 시대의 미술가는 어떤 태도로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증거로 '무엇'에 해당하는 작품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이런 슬픔에 대해 이런 입장을 취한다'라는 것에 대한 시각적인 결과물로 작품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작가의 '어떻게'에 해당하는 영역을 혹자는 스테이트먼트(statemen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을 새삼 미술만의 메커니즘인냥 표현했지만 소설이나 영화 역시 '나는 이러한 사건 사고 혹은 이러한 네 감정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으면 좋겠어'라는 제안에 스토리텔링을 입혀 조금 더 긴밀하게 몰입되게 하고 그것에 기대어 제 증거물들에 신빙성을 더하는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음악, 무용, 어떠한 장르의 예술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잠시 샛길로 빠지면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도발적이며 자극적이다. 그것은 위계적이며 그래서 또한 자본주의적이다. 12월에 그 '작가상'을 수상하게 될 그 작가가 마치 올해 활동한 작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처럼 들리게 하는 착각을 준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작명으로부터 발생하는 필요 이상의 권위에 대하여 전적으로 긍정하는 바이다. 권위가 시선을 부른다. 그리고 <올해의 작가상>은 그 시선들에게 매년 꽤 의미있는 메시지들은 전달해왔다.
작년에는 외국인 노동자를 주제로 하여 터전을 기준삼아 편가르기를 하는 우리의 인식을 반향하게 했고 재작년에는 사각지대라는 제도권 밖의 영역을 관객으로 하여금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시스템이라고 하는 이 사회문화적 규준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즉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지는 낯간지러운 호객행위에도 불구, 매년 수상하는 작가들의 주제의식이 그 타이틀을 내어줌에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반성케 하는 구석이 있다.
다시 돌아와 그들의 '어떻게'에 관하여 계속 얘기해보려 한다.
이번 2017 올해의 작가상 전시장의 신작들 속 그들 역시 '올해의 작가'로서의 사명감은 없다.(이것은 매년 비슷했다) 그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시대의 올바른 작가상(象)은 무엇인지, 혹은 올해의 대표자로서 전달해야 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또한 없다. 오직 관객이 그들의 작품으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와 작품을 조작하고 체험하며 나아가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소비하고 돌아가길 바라는 염원만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느낀 올해 네 작가의 공통점은 여기서 좀 더 들어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자신으로부터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이들의 태도가 이번 전시의 관람객들에게 강력한 힐링으로 가닿으리라 보는 것이다. 작품이 특히 컨템포러리 시대에 그것이 관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완성된다는 표현은 이미 클리셰가 돼버린 지 오래다. 그것은 구상이 타블로에서 튀어나온 이후부터, 조소가 좌대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제 스스로의 존립을 보장받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대전제이기도 하다.
'그 시절의 저는 아마 그게 힘들었었나봐요', '제가 찍어온 소스가 저에게 '이렇게 해라'라고 이야기 해요', '어느 순간부터 제 작품에 소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올해의 그들이 제 작품에 대해 해설하는 방법은 대개 이런 식이다. 제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주권마저 가상의 누군가에게 일임한 것 같다. 객관화를 넘어 타자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것이 올해 선정된 네 명의 작가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지금(只今)의 예술 경향이다. 그리고 '누가 이 경향을 가장 흥미롭게 시각화 했는가'라는 기준 아래서 박경근, 백현진, 써니킴, 송상희 네 명의 작가가 선정되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현재의 예술가들이 공유하는 이런 식의 태도는 '이 시대의 예술가는 관객의 머리 속에 어떤 이미지를 투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끝에 취하게 된 '어떻게'의 행동양식일 것이다. 미술이 교조적으로 군림하지 않되 유효할 수 있도록, 요란스럽지 않되 외면 받지 않도록 그들은 미친듯이 고민한 끝에 그들이 생각한 최선의 예의(manner)를 내놓는다. 우리는 그 작품들 속에서 '내가 어찌 예술한답시고 너의 슬픔을 소재 삼을 수 있겠어.(송상희)', '나는 작가로서 완벽한 이미지를 좇고 있지만 이것이 어찌 네게도 완벽한 것이라 강요할 수 있겠어(써니킴)', 혹은 '작품 안에 의도를 숨겨 놓고 찾아보라는 식으로 어찌 작품의 주인인 너를 기만할 수 있겠어(백현진)'와 같은 그들의 아주 조심스럽고 따뜻한 마음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 그들의 형식이 볕처럼 따뜻한 색온도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집중해 작품을 체험해보면 그러한 형식이 우리 속에 늘 내재하며 불안하게 만든 그 원형적 산물이라는 것을, 그것들을 우리 속에서 꺼내주어 대신 울어주는 퍼포먼스로 나타난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네 작가의 작품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