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논픽션 다이어리>의 한 장면. 삼풍백화점 참사를 담은 모습.
영화사진진
502명이라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낳았고 2013년까지 전 세계 단일 건물 가운데 외부 충격없이 자연적으로 붕괴된 사고 가운데 당당히(?) 사망자 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삼풍백화점 사고는 그렇게 외딴 공원 모퉁이의 위령탑으로만 남아있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이 삼풍백화점과 다를 수 있을까? 이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에 대한 질문이다. 처음 약속과 달리 박근혜 정부는 특별법 제정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고, 7월 30일 재보선이 끝난 후 자신감을 회복한 새누리당은 세월호 손털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광화문에서는 아직 유가족들의 단식이 이어지고 있고, 참사 100일 문화제에는 3만명이 넘는 시민이 모였으며, 농성장 휴가를 계획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사고의 의미를 축소하려 하고,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이 사고를 통해 안전과 생명보다 이윤을 택했던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둘러싼 힘겨운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잊혀진' 대구지하철 참사,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지난 7월 유가족들이 단식을 하고 있는 광화문 농성장에 엄마부대봉사단이라는 보수단체가 찾아와 기자회견을 한다며 막말을 퍼붓고 갔다. 봉사단 부대표의 발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사고난 사람들 이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한 학교에 많은 학생들이 한 번에 죽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세상에 대구지하철 사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누가 이런 소리 합니까."
대구지하철 사건. 그때도 20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죽었다. 일부 실종자는 사망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었는데 왜 세월호 유가족만 유독 이러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고 이후에 가만히 있었던 유가족은 없었다. 그 유가족들과 함께 하지 않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대구지하철 사고를 다시 돌아보면 우리 사회가 이 사고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대구에서 지하철을 건설하면서 세 차례나 대형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5년 대구 상인동 지하철 1호선 제1~2구간 공사장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고, 2000년 1월 대구 중구 동산동 대구지하철 2호선 공사현장(현 대구지하철 서문시장 역 부근) 붕괴 사고, 2003년 2월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방화 사고까지. 무려 두 번이나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난 참사였다(가스폭발 사고로 사망 102명, 부상 117명·방화 사고로 사망 192명, 실종자 21명, 사상자 151명).
전 세계에서 지하철과 관련한 사고 중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는 단 세 차례뿐. 이 중 대구에서만 두 번의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백승대, 대구지하철 사고와 시민단체의 대응, 2003 참고)
대구 지하철 방화 사고 당시,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이 고위 정치인의 방문에 대비해 군대를 동원해 현장을 물청소 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도 얼마 없을 것이다. 그 사장을 유족들이 간신히 '증거인멸혐의'로 고소했다는 사실도, 1년 반간의 법정 싸움 끝에 2004년 결국 그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도, 그 법정에서 오로지 유가족들만 울부짖었던 사실도 우린 모른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한 달 뒤 유가족들이 '안전한 지하철'을 요구하며 지하철 점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야 몇몇 활동가들은 그때 유가족들이 서울까지 찾아와 함께 싸워줄 것을 호소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전국을 뒤흔들었던 사고였으나 사회는 이를 너무 빨리 잊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논문이나 옛 기사 한 구석, 몇몇 단체 활동가들의 기억 저편에만 남아있다.
진상규명하지 못하면 참사는 또 일어날 것,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