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교수의 기발한 트릭과 거짓말은 점입가경이다. 정 교수가 <길 잃은 역사대중화>에서 한 말을 소개한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정조실록의 다음 기록에 근거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다. 의식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무의식은 빙산 그 자체다. 의식과 무의식은 상호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꿈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칼 구스타프 융은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삶속의 사건으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갖가지 꿈을 말한다. 총명한 혜경궁이 꿈을 언급한다고 그가 바보가 되지는 않는다. 오늘도 전 세계에서 숱한 총명한 이들이 어젯밤 꿈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시대적 맥락, 정치적 지형과 무관한 '반역죄'를 말하는 것인가? 사도세자가 당대의 날카로운 정치적 대립과 갈등, 당파적 이해와 무관하게 '순수하게 미쳐서 꿈꾸거나 추진한 반역죄'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반역죄를 말하려면 1차 사료를 종합적으로 비판하고 역사학적 방법으로 접근해야한다. 사료에 무수히 전하는 팩트를 다 부정하려면 말이다. 잣대가 그때그때 다르고 근거가 없는 추론은 학문적으로 의미가 없다.
이는 문학적 상상력과는 다른 문제다. '미쳐서 한 짓이니까 용서해 주자'가 혜경궁의 뜻이라는데, 혜경궁이 무엇을, 누구에게, 왜, 용서를 구한다는 말인가? '미친 사도세자와 영조가 문제지 우리 집안은 책임이 없다'는 것이 <한중록>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혜경궁은 자신의 친정집안과 함께 사도세자 죽음에 동참한 가해자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사도세자는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의 처가가 아니라 형수 집안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사도세자를 보호했다는 죄명으로 사형당한 소론 영수 조재호는 형수의 오빠다.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조재호에게 보낸 전령을 친정아버지 홍봉한에게 일러바친다. 홍봉한과 노론은 소론 최대 명가 출신이자 소론 영수인 조재호가 세자와 결탁한 혐의를 확보하고, 세자에 이어 조재호를 사형에 처한다.
사도세자는 죽음의 현장으로 가는 날 혜경궁에게 "자네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라는 말을 남긴다.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유일하게 읍소하고 매달린 가족은 아들 정조 밖에 없었다.
나는 독자들에게 <한중록>과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그리고 정 교수의 글을 일독하길 권한다. 아무리 해석을 다양하게 해도 학문을 하려면, 역사적 팩트 자체는 인정해야 한다. 팩트를 외면하거나 뒤틀어버리면 학문이 아니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왜 썼을까? 글쓰기에 취미가 있다거나 궁중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려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 교수 말처럼 누구에게 어떤 용서를 구하자는 것도 아니고, 궁중실상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의도도 아닐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문제는 집안의 명예회복과 신원이다. <한중록>은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의 왕위 등극을 방해한 혐의로 정조에 의해 몰락한 친정 집안을 옹호하고 신원하려는 목적으로 가해자 측에 선 혜경궁이 쓴 글이다. 혜경궁은 어릴 때부터 집안을 일으킬 재목로 키워졌고, 뼛속까지 가문을 중시한 인물이다.
<한중록>을 그저 담담히 읽으면 누구나 그 맥락과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설명하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중록이라는 문구멍으로만 사건을 보면,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문구멍에 의존해 재단하다보니 경직된 시각과 주장이 나온다.
- 사도세자가 총명하고 똑똑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정병설 : "이 견해의 가장 주요한 근거는 정조가 쓴 <사도세자 행장>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행장(전기)을 쓸 때 불리한 것은 싹 빼 모호하게 적어 놨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사랑을 받던 때도 있었는데, 그런 부분만 딱 모아놓은 거다. 그걸 가지고 이은순 선생이 먼저 <한중록>을 비판했고, 이덕일 소장도 그 논지에 따랐다. 문제는 이들 모두 사도세자 행장을 잘못 읽었다는 점이다. 정조는 결코 사도세자 행장에서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정조는 아버지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것을 후대 학자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해석한 것이다." (2011년 11월 9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어릴 때의 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송나라 태종이 소년 천자라는 말을 비웃었다"
영조의 세자에 대한 자부심은 <영조실록> 도처에 기록돼 있다. 영의정 조현명은 경연에서 "신이 세자를 바라보니 천고에 보기 드문 기상을 지니고 있으나 앞으로의 성취에 대한 책임은 전하께 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조 36년, 사도세자는 종기 치료 차 온양 행차를 한다. 영조의 곁을 떠나 그가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수행원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였다(<영조실록> 중). 세자는 백성들이 행차를 에워싸면 번번이 행차를 멈추고 농촌의 질고를 물었다. 조세와 부역의 과중함을 호소하면 세자는 그 때마다 지방관을 불러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라"고 명령한다.
귀경길에 충청 감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가뭄으로 밭이 태반이나 묶여 마음이 몹시 가엽고 슬픈데도 은혜로운 정사가 한 가지도 없으니 심히 겸연스럽구나. 재해를 입은 논밭의 전세를 면제해주는 것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인데, 이 역시 허실이 섞여서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다. 수령에게 분부해 마음을 다해 잡역을 감해주고 전세를 면제해주는 일을 받들어 행하게 하라." (<영조실록> 중)
노론과 혜경궁이 사도세자가 미쳤다고 하던 시기, 그가 죽기 2년 전에 있었던 온양 행차에서 세자는 성군의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준다. 약원에게 미리 약을 조제시켜 더위 먹은 장수와 병사들을 구제해 긴 행차 후에도 천여 명의 사람 중 한 사람도 앓는 자가 없었다.
나주 벽서사건으로 공포의 살육이 시작된다. 무고한 생명의 국문과 사형을 청하는 노론의 상소에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는 "모두 따르지 않겠다"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다. 사도세자가 총명하고 똑똑했다는 기록은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정 교수의 '총명'과 '똑똑'의 개념이 일반 상식과 다르다는 것을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 밝혔다. '억울하게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른척하고, 백성의 고통과 민폐를 당연히 생각하고….' 정 교수는 이런 것을 총명하다고 생각한다.
정 교수는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다'를 <사도세자의 고백>의 핵심 명제라며 틀렸다고 규정했다. 역사학은 원인에 대한 문제 인식, 현상 이면의 본질과 맥락을 통찰하는 접근 방식을 중시한다. '미쳤다' '미치지 않았다'는 결과와 현상, 단면의 문제다. 사도세자의 정신 병리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판단하는 시각은 다양하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의사에 따라 소견이 다른 경우가 많다.
칼 구스타프 융은 자신의 환자를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속의 개인으로 봤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개인적 정신 상태나 부자지간 갈등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사회·역사적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그런데 정 교수는 이를 틀렸다고 했다. 정 교수는 이런 비학문적 주장을 정직하게 시인하지 않는다.
정 교수는 "문제는 이들 모두 사도세자 행장을 잘못 읽었다는 점이다"라며 자의적인 자신의 해석만 옳고 다른 견해는 모두 틀렸다고 주장한다. 성찰과 객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 교수는 자신이 한 말을 늘 뒤집는다
-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는 정병설 교수가 가해자 측 기록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만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다른 증거자료에는 눈을 감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정병설 : "그들은 내가 <한중록>을 100% 믿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해 작업을 하지도 않았다. 요즘 많이 나오는 대통령 자서전과 견줘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대통령들이 자서전을 왜 썼겠나? 자기변명을 위해 쓴 책이니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겪지 못한 일을 보고 겪은 사람이다. 자서전으로서의 한계는 한계대로 있겠지만 그만큼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2011년 11월 9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정 교수는 <사도세자의 고백>을 100% 잘못된 책으로 단정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모두 틀렸고, 하나의 근거도 없다고 했다. 상대의 시각과 논거, 프레임, 학문방법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 이유는 "한중록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다"였다. 정 교수의 말이다.
"이 연재는 <한중록>이라는 문구멍을 통해 18세기 조선을 다시 보고자 하는 시도다. 마음이야 파노라마식으로 시원하게 보고 싶지만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각자 자기가 뚫은 구멍을 통해 볼 뿐이다. … 나는 사건의 전후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한중록'을 갖고 들여다보면서 관련 자료를 얼마간 더 봐서 18세기 조선의 역사를 엮어볼 생각이다." (<길 잃은 역사 대중화> 중)
정 교수는 <한중록>에 의거해 자신과 해석을 달리하는 상대를 전적으로 틀렸다고 몰았다. 내가 "정 교수는 <한중록>을 모두 옳다고 본다"고 지적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옳기 위해서는 상대가 전적으로 틀려야 한다는 폐쇄적인 승자독식의 도그마를 반복했다. 나는 이런 태도를 빗대 비판한 것이다. 정교수 자신이 한 말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이다.
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무엇이 남겠는가. 정 교수는 <한중록>뿐 아니라 상대의 말도 그렇게만 본다. 정 교수의 시각을 함축적으로 상징해서 표현한 수사인데, 그는 논점이탈을 위해 진부한 트릭을 구사한다. 언어는 상징적 능력의 산물임을 국문학자가 모른단 말인가. 자신의 텍스트를 보라. 혼자 머릿속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다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하는 의도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 교수 자신이 텍스트에서 한 말을 확인하기 바란다. 사석에서 그런 생각이 없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중록>에는 사실도 있고, 과장도 있고, 왜곡도 있고, 거짓말도 있다. 무엇보다 <한중록>이 가해자의 기록이고, '사도세자 사건에 대해 서술한 다른 기록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 <노론300년 권력의 비밀>의 주장이다.
누가 <한중록>을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나?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누가 부정한단 말인가? 이건 다른 영역의 문제다. 정 교수는 매양 이런 식으로 논점을 흐리고 상대를 흠집 내려 한다. 문자 그대로 믿는 것과 사료로서의 가치 인정하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어떤 텍스트도 그대로 읽을 수 없다. 대통령의 자서전? 이명박 대통령이 자서전을 쓰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겪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가치만 고려해야 하나?
이명박의 자서전은 특별한 가치가 있나?
"<한중록> 역시 그런 가치가 있다. 혜경궁은 70년을 궁궐에서 살았고 대왕대비에 버금가는 높은 지위를 누렸다. 보고 들은 것들이 예사 정보가 아니다. 친정 변호를 위해 썼다는 점을 감안하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겠지만 중요한 사료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2011년 11월 9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혜경궁의 70년 궁궐 생활, 대왕대비에 버금하는 높은 지위 등은 지금 얘기할 주제가 아니다. 이순자씨가 청와대 생활을 얘기하면 몰랐던 사실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1980년 광주학살을 옹호하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친정 변호를 위해 썼다는 점을 감안하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겠지만"이란 말은 반갑다. <길 잃은 역사대중화>에선 이와 비슷한 표현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하나도 근거가 없고, 모두 잘못 됐다는 정 교수의 판단은 철회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그런데 정 교수는 바로 뒤에서 "내 저술에는 <사도세자의 고백>보다 훨씬 많은 사료들이 인용됐다"는 엉뚱하고도 치기어린 발언을 한다.
- 인터뷰를 마치며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정병설 : "결국 터무니없는 말들이 정설 행세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학계에서 심도 깊은 연구가 나오고, 냉정한 학문적 비판이 이루어지면 이런 엉터리 저작은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2011년 11월 9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역사에 정답은 없다. 역사는 다양한 시각으로 사료를 비판하고, 만 가지 해석이 공존하며 진실을 추구한다. 역사는 질문을 던지며 진실의 근삿값에 이르는 과정이다.
거짓은 거짓이고 진실은 진실이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외길이 아니다. 다양한 견해가 공존할 때 진리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 더 보여준다. 십인십색, 화이부동(和而不同·조화를 이루지만 서로 다르다)이다. 성숙한 역사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타성이 아니라 공존과 평화를 지향한다. 위대한 진실은 이렇듯 단순한 법이다.
겸손함과 열린 태도로 이번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문적 논쟁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17세기 이후 '사문난적'(주자학을 문란하게 한 도적)이라는 말이 생겨 주류학문은 나와 다른 타인을 억압하고 유폐하는 폭력적 도그마로 변질했다. 이는 일제식민주의로 연결되어 지금껏 한국인문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논쟁은 계속 돼야 한다. 나는 끝까지 논쟁에 책임 있게 임할 생각이다. 정 교수 뿐만 아니라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 다룬 안대회, 오항녕, 유봉학 교수는 물론 서울대 국사학과 등에서 적극 나서주기를 기대한다. 일제식민사관과 그 유제는 우리 삶의 커다란 질곡이다. 닫힌 이데올로기와 경직된 사유를 이제 더 이상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은 김구 선생께서 <나의 소원>에서 하신 말씀이다.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었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렴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 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직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거짓은 거짓이고 진실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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