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가 들어간 민화유연준 촬영
7년쯤 전이었나요. 10월에 부안의 변산반도 여행을 나섰습니다.
한 절에서 머물기로 하고 떠났는데, 그만 한밤 중에 도착하게 되었어요. 주차를 하고서 언덕을 올라가니 절이 보였습니다.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밤이었어요. 초행길인 데다가 대숲이 우거져 깊이를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보니 달은 환하게 떠있었지만, 올라오는 길가의 숲이 워낙 우거져 어두웠던 것입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비구니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씻은 뒤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마당을 내다보니 요사채 앞에 아름드리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빨갛게 익은 감이 달빛을 받아 등처럼 빛나고 있더군요. 우리의 가을을 특징짓는 쌀쌀하고 건조하면서도 상쾌한 밤이었습니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몸은 노곤했어요. 그런데도 잠이 오질 않는 거예요. 출출하기도 해서 둘러보니 스님께서 따다가 방안에 놓아둔 감이 한 소쿠리 있었습니다. 손님 접대용이겠거니 하고는 몇 개 집어 먹었어요. 함께 주무시는 분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제대로 씻지도 않고 껍질을 벗겨가며 '대봉'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감을 두어 개 조용히 먹었지요.
공복감이 사라지고 나니 이내 잠이 들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화장실이었어요. 잘 알다시피 시골의 작은 절에서는 화장실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그 절에서는 게다가 화장실에 가려면 컴컴한 대숲을 끼고 70m쯤 걸어내려가야만 했어요. 그래서 아침이 될 때까지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점점 급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선 벽돌만 한 손전등을 들고 남편을 조용히 깨웠습니다. 혼자서는 무서워서 갈 수 없었으니까요. 바람에 쉭쉭 삭삭 소리를 내는 대숲이 마치 영화 <에이리언>을 보는 기분이었어요. 잠결에 투덜대는 남편을 앞세우고 결국은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갈 때는 전혀 몰랐는데, 볼일을 보고 돌아나오니 순간 환한 덩어리가 눈앞에 펼쳐졌어요. 전등을 비출 것도 없이 달빛에 반짝이는 노란 국화 무더기였습니다. 손톱만 한 국화꽃이 하도 많이 피어 가지가 땅으로 쳐박힐 것 같았어요. 아침에 일어나 다시 가보니 맑은 바람에 떨어진 낙엽 냄새와 함께 국화향이 은은히 풍기더군요. 다른 꽃들은 거의 다 가지에 매달린 채 시들어 가는데도 국화만은 꿋꿋하게 예쁜 꽃을 피우고 있더군요.
그래서인가요. 가을이 오면 그 때 맡았던 냄새를 찾게 됩니다. 도심의 어느 한적한 골목길, 변두리 동네의 야산 언저리, 북한강을 끼고 춘천으로 가는 국도변의 허름한 휴게소 언저리 등등.
그 때의 냄새를 맡으면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날 밤의 국화꽃, 정확히는 토종 감국을 생각하곤 해요. 그 향기는 때로는 곱게 늙은 여인네의 향기처럼, 또 때로는 정갈한 선비의 기품처럼 도심의 매캐한 매연 속에서도 어느 순간 자신을 드러냅니다.
도심의 매연 속에서도 기품있게 피어난다
동양에서는 보고 즐기기 위한 관상용으로 예로부터 국화를 귀하게 대접해왔습니다. 늦가을 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초한 꽃을 피워 사군자의 하나로 사랑을 받았지요.
국화는 뭇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이나 여름을 피하여 서늘하고 맑은 늦가을에 고고하게 피어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서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단아한 자태로 피어나 깊은 향기를 풍기는 이것을 선비가 지녀야 할 덕목 중의 하나인 지조와 절개로 보았어요. 이정보라는 선비가 시조 형식을 빌려 노래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쉽게 짐작이 갈 겁니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자연 현상에서 인생의 진실을 배우곤 했던 우리 선조들은 늦가을 찬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피어난 그 모습을 보고서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자연 속에 숨어 사는 은사의 풍모를 느꼈다고 해요.(이상희,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제3집, 넥서스, 242쪽)
국화는 그래서 '은일', 즉 속세를 떠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런 상징성은 주돈이의 <애련설> 가운데 국화에 대한 언급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내가 말하건대, 국화는 꽃 중에 속세를 피해 사는 자요,…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로 들어본 일이 드물고….
도연명은 당나라 시인으로서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벗하면서 살았다고 해요. 이러한 일화 때문에 국화는 자연을 벗하며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삶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귀거래사를 읊은 후 도연명은 은둔생활에 들었고, 집착을 끊은 그 삶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화' '도연명' '은일'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해요.(조용진, <동양화東洋畵 읽는 법>, 집문당, 123쪽)
은일은 요즈음 말로 하면 정신이 세속을 초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공간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어디에 있든 스스로 외지고 조용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작가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어디에 살고 있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마음이 멀어지는 상태', 즉 정신적 초탈과 숭고함이 아닐까 합니다.(호아위평 책임편집, 서은숙 옮김, <시는 붉고 그림은 푸르네>, 학고재, 94쪽)
초막을 짓고 사람들 속에 살아도
말과 수레소리 시끄럽지 않네.
어찌하여 그런가
마음이 속세를 떠나면 저절로 그렇다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다가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네.
산기운은 해질 무렵 아름답고
날던 새들은 짝지어 돌아오네.
여기 참된 뜻이 있으니
말하려다 문득 말을 잊네.
-도연명 <음주>
이런 연유로 강희안은 "자연에 묻혀사는 호사가들은 국화를 군자에 비견하곤 한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계절이 바뀌어 초목이 시들게 될 때 홀로 찬란하게 피어나 바람과 이슬을 꿋꿋하게 견디니 산인과 일사(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뛰어난 선비)의 절개에 견줄 만 하다, 적막하고 매우 춥더라도 도를 즐기는 넉넉함은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강희안, 서윤희·이경록 옮김, <양화소록>, 눌와, 37쪽)
국화는 가장 늦게 피어나는 꽃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론 서리가 내린 뒤까지도 가지에 매달려 있기도 해요. 예전에는 서울이 굉장히 추워서 집집마다 김장을 하고 나서는 국화를 베어 다발을 만들어서는 집안에 꽂아 놓고 뿌리는 실내로 옮겼다고 해요. 돌아가신 할머니께서는 집안에 들여놓은 국화가 말라서 설이 올 때까지도 방안에 향기가 남곤 했는데 요즘 꽃은 왜 향기도 덜하냐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이렇게 늦게 꽃을 피우는 생태적 특성 때문에 '노경' '성숙'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노경의 경지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거예요. 서양에서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늙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처럼 향기로워지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추위 속에서도 홀로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