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상 교수가 만든 김건희 여사가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내용 일부분. 노란색으로 칠해진 곳이 표절 의심을 받고 있는 부분이다.
구연상 페이스북
김 여사께서 표절한 내 논문 <디지털 컨텐츠와 사이버 문화>(2002년)는 이러한 나의 두 갈래 학문적 방향성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그때 한류의 중심은 드라마였지만, 나는 한류의 역동성과 파급력을 그 내용보다는 그 형식, 말하자면, '디지털 컨텐츠'(기술적 측면)에서 찾았던 것이고, 디지털과 컨텐츠 그리고 그 둘이 다물려 만들어진 합성어 '디지털 컨텐츠'에 대한 '우리말 뜻매김'을 마련하고 싶었다.
김 여사께서는 '디지털 운세 컨텐츠'를 주제로 잡았기에 '디지털 컨텐츠'에 대한 우리말 뜻매김을 '우리말다운 우리말'로 풀어내는 내 논문에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출처 표시로 그에 대한 감사를 표했어야 마땅했다.
김건희 스스로 표절 시인하고 학위 취소 요구해야
하지만 김건희 여사는 2007년의 논문에서뿐 아니라 그 표절 의혹과 표절 사실이 드러난 2022년 현재까지 모르쇠를 잡고 있다. 그분의 '모른 척하기'는 그 자체로 또 다른 '몹쓰리'(악행)로서 한국의 모아리(사회(社會)가 그동안 민주주의(民主主義, 우리 모두가 모두를 위해 모두에 의해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에서 나람(나라의 사람들,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영부인의 지위에 계신 분은 나람의 뜻을 높이 받들고, 그 말과 행동으로써 그 뜻을 구현해야지, 그것을 뒤로 되돌리는 잘못을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우리 모두의 나라)이다"라는 말에 나오는 '우리'는 '운명 공동체'를 뜻하고, '모두'는 갓난아기로부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다 아우른다.
영부인의 모르쇠잡기는 '우리'를 '분노'의 공동체로 몰고가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 사람들의 성난 마음을 풀어주는 데는 '진심어린 사과'만이 약(藥)이다. '사과(謝過)'는 자신이 자신의 허물로 저지른 잘못의 결과를 스스로 떠맡아 지고, 자기 자리를 떠나거나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때 떠맡으미(사과하는 사람)는 가장 먼저, 잘못의 책임이 자신의 허물에 있음을 깨끗하게 시인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 잘못의 피해를 본래대로 돌이키려(회복 回復)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방지책을 내놓아야 한다. 진정(眞情)한 사과는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지만, 말뿐인 사과는 분노를 더욱 키울 뿐이다.
김건희 여사의 사과가 그 진정성이 전달되려면 적어도 사과의 두 번째 단계까지는 포함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표절 시인'과 '학위 취소 요구'가 들어있어야 한다.
지난해 7월부터 2022년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김건희 여사의 '표절 논란'은 2008년 광우병 사태의 전개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도 광우병 촛불집회와 관련한 기억들은 크게 둘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시위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멀리서 언론 보도를 통해서만 그 문제 해결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흐려지는 기억일 것이다. 어쨌든 모든 기억은 그 뒤 새롭게 닥쳐온 수많은 굵직한 문제들에 이리 긁히고 저리 할퀴는 바람에 빛바랜 사진처럼 잊혀 갈 것이다. 이러한 망각은 축복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그 모든 상처를 딛고 건강해졌다는 징표다.
하지만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는 '우리'를 다시금 새롭게 둘로 갈라놓았다. 이때의 갈라짐은 쪼개짐에 가까워 '우리'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그들' 또는 '저들'과 함께할 수 없는 '적(敵)'으로 나누고 말았다. 진영 논리는 진실의 블랙홀과 같아서 그 반작용으로 '말도 안 되는 말들'과 '거짓들'(가짜뉴스)을 쏟아내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쪽 사람'과 '저쪽 사람'으로 갈리어 서로를 헐뜯는 데 혈안(血眼)이 되었다. 진실의 목소리는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처럼 순간 흩어질 뿐 아무런 무게도 갖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의 삶은 본디 '함께살이'이자 '따로살이'의 운명을 타고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때마다 헬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갈래로 찢어지기도 하고, 그로써 낱사람으로 하나하나 흩어지기도 하지만, 갑자기 큰물이 넘치듯 한 자리로 쏟아져 나와 '집단적 신체'처럼 한몸으로 움직이는 큰 무리를 이루기도 한다. 이때 모아리(사회(社會))는 격변(激變)이나 격랑(激浪)의 고비에 놓인다. 토인비는 역사의 발전이 미메시스(Mimesis, 닮아나감)와 네메시스(Nemesis, 복수 復讎 되갚음, 앙갚음)의 원리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나람(국민)이 엘리트(지도자, 指導者)를 따르려 할 때 그 모아리는 발전하지만, 그들이 진입장벽을 만들어 특권을 누리면서 나람의 뜻을 배반할 때 모아리는 혁명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제 일을 다 하는 가운데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바라기한다. 행복(幸福)은 사람이 저에게 아프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저가 바라는 바의 막힘과 걸림이 없이 더 바랄 게 없는 마음(만족,滿足)에 놓이는 것을 뜻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나라는 '올바른 법'에 의해 다스려질 때만 세워질 수 있다. 그 법과 시스템이 한쪽에게 치우쳐 기울어진 나라는 적은 사람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을 불행으로 빠뜨린다. 불행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건져줄 의무와 책임이 나라(국가,國家)에 있는 한 국정을 맡은 사람은 언제나 '법의 올바름'을 실천해야 한다.
슬기맑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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