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에 관한 역대 남북합의. 위의 두 사진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찍었고, 아래 세 사진은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복사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도출한 고위급 회담은 제5차다.
김종성
그런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역대 합의서 속의 불가침 보장 조항이다. 서로를 열렬히 염원하는 연인들은 어떻게 하면 더 자주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덜 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할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적다. 간절히 염원하는 사람들은 상호 충돌을 걱정하거나 '불가침'을 약속할 필요성이 낮다. 대개는 그렇다.
그런데 남북은 통일을 염원하면서도 불가침을 걱정한다. 7·4 공동성명 제2항에서는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라고 말했고,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제2장 남북불가침' 항목을 두었고, 10·4 선언에서는 "어떤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 의무를 확고히 준수하기로 하였다"고 말했고, 이번 판문점 선언에서는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6·15 공동선언에서만 불가침 문제에 관한 언급이 없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상호간의 충돌을 걱정하는 경우는 대개는 제3자가 개입됐을 때다. 둘의 사랑을 훼방하는 제3자가 있을 때, 이로 인해 자신들이 대립관계로 바뀌지 않을까 염려하게 된다. 자신들의 의지만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 때 그런 걱정을 하게 된다.
남과 북이 통일을 염원하면서도 동시에 상호 침략을 걱정하는 것은, 양 당사자의 의지만으로 이 관계가 유지되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 정권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품고 있지만, 이 관계를 자기 이익대로 끌고 가려는 제3자 혹은 3자들에 대한 두려움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북은 충돌 가능성을 방지하는 장치들을 합의서 안에 차근차근 축적해왔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이를 위해 6개 조문을 배치했다. 인상적인 것은 군사당국 간의 직통전화 설치다. 싸울 일이 있을 때는 직통전화로 오해를 풀자고 했다. 사실, 직통전화까지 설치할 수 있는 사이라면 처음부터 전쟁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0·4선언에서는 서해상의 충돌 방지대책과 평화체제 구축 및 종전선언 등을 통해 불가침을 담보하려 한 데 이어, 이번 판문점 선언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도 거론하고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로의 전환도 거론하는 등의 방법으로 불가침 보장에 만전을 기하고자 했다. 통일로 가는 길목이 우발적 사태로 막히지 않도록 하나씩 하나씩 쌓아온 것이다.
통일 원칙, 교류·협력 모색, 통일국가 체제에 관해서도 상당 수준의 합의가 축적됐다. 7·4 공동성명에서는 통일 원칙이 합의됐다. '자주적 통일, 평화적 통일, 민족 대단결에 의한 통일'을 통일의 원칙으로 내걸었다.
이 원칙은 남한 정권의 변화에 관계없이 파기되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됐다. 3대 원칙 중에서 '민족 대단결에 의한 통일'은 사상·이념·제도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는 통일이다. 홍준표처럼 편향된 사상·이념·사고를 가진 사람도 통일 국가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자고 그때 이미 합의를 해뒀던 것이다.
교류·협력 문제는 10·4 선언과 판문점 선언을 통해 한층 구체화됐지만,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꽤 상세히 규정됐다. 이산가족, 인적 왕래, 철도 및 도로 연결, 우편 및 전기통신 교류 등에 관한 사항이 이때 대략 합의됐다. 이 같은 교류·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발달시키자고 남북기본합의서는 말했다. 이때 처음 등장한 '민족경제'란 표현은 이번 판문점 선언에도 언급됐다.
통일 뒤에 어떤 유형의 '주택'에서 살 것인가, 그러니까 통일국가 체제의 문제는 2000년 6·15 선언에서 대략적 합의됐다.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이에 관해서는 아직 완벽한 합의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의 희망사항을 인정하고 이를 절충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그 후의 합의문에는 이에 관한 언급이 없다. 향후의 합의에서 계속 채워질 부분이다.
보수정권도 원했던 '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