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퇴진' 외친 100만 촛불'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12일 서울 세종로, 태평로 일대에서 열린 가운데 수십만의 참가자가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00만 촛불의 힘. 최순실 국정농단에 맞선 '박근혜 정권 퇴진 3차 범국민행동'이 열린 지난 12일 오후 광화문 일대에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운집한 걸로 알려진 가운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날 2016 민중총괄기와 범국민행동이 열린 서울시청 광장과 광화문광장 일대는 물론, 사직로에서 안국동사거리, 새문안로에서 종로2가, 청계천광장과 청계천로, 신문로에서 을지로2가, 남대문로까지 인도, 차도 구분 없이 인파로 가득 찼다. 주최쪽에선 이날 7시 30분쯤 집회 참여 인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고 밝혔지만, 같은 시간 경찰은 26만 명이 모였다고 추산했다. 주최쪽과 무려 4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과연 이날 정확한 집회 참가자 숫자가 얼마인지 <오마이팩트>에서 따져봤다.
100만 대 26만, 집회 참여 인원 4배 격차 이유는?집회 참가자수 차이가 나는 건 이날뿐이 아니다. 지난 5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차 범국민행동 참가자도 주최쪽은 20만 명이라고 밝혔지만 경찰 추산은 4만 5천 명 수준에 그쳤다.
또 지난 2008년 6월 10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때도 주최 쪽은 50만 명이 참여했다고 밝혔지만, 경찰은 10만 명으로 추산했고, 지난 2004년 3월 20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100만인 대회 때도 주최 쪽은 25만 명, 경찰은 13만 명이라고 추산했다.
이처럼 주최 쪽과 경찰 추산 차이가 이렇게 큰 건 집계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최 쪽은 집회 장소에 잠시라도 머문 모든 참가자를 더한 연인원을 집계하는 반면, 경찰은 특정시간대(12일은 오후 7시 30분 기준)에 모인 순간 최대 인원만 집계한다. 경찰이 사용하는 '페르미 추정법'은 집회 장소 전체 면적에 단위면적당 인원수를 곱해 계산한다. 경찰은 1평(3.3제곱미터)에 앉을 수 있는 성인 숫자를 5~6명, 서 있을 경우 9~10명 정도로 계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의 경우 경찰의 최대 인원 집계 방식이 적절할 수 있다. 참가자들이 대부분 축구 경기가 진행 되는 2시간 정도에 집중적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국 집회처럼 장시간 이어지는 행사 참여 인원을 계산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 12일에도 오후 2시부터 사전행사가 대학로를 비롯한 서울 도심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열렸고, 본행사도 오후 4시 서울광장 민중총궐기에 이어 오후 7시 30분 광화문광장 범국민행동으로 계속 이어졌다. 또 공식 행사가 끝난 뒤에도 경찰 저지선인 경복궁역 앞을 비롯한 광장 곳곳에서 시민 발언대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날 행사장에 장시간 머물기 어려운 어린 자녀나 노부모를 동반한 가족 단위 참가자나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연인원 집계 방식이 더 합리적이다.
문제는 연인원은 정확한 집계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인원을 정확하게 집계할 수 없어 최대 참여 인원을 기준으로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다.
남정수 민주노총 대변인은 14일 "지난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각종 집회 경험을 토대로 연인원을 추정할 뿐 집계 방식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라면서 "다만 이날 각 단위에서 집계한 민주노총 참가자들만 15만~17만 명 정도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고 밝혔다. 남 대변인은 "전체 참가자는 애초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70만~80만 명 정도를 예상했는데 일반 시민 참여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덧붙였다.
과거 여의도 광장처럼 전체 집회 참가자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대규모 집회 장소가 사라진 점도 정확한 참여 인원 집계를 어렵게 만든다. 지난 1971년 박정희 정권 당시 '5.16광장'으로 출발한 여의도광장은 지난 1999년 여의도공원으로 탈바꿈하기까지 단골 집회 장소였다. 모두 아스팔트로 포장된 여의도광장 전체 면적은 12만 평(약 40만 제곱미터)에 달해 한꺼번에 100만 명 이상이 모일 수 있었고 비행기 활주로 역할도 했다.
지난 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후보 유세에 130만 명 이상이 모인 걸로 추산되고, 지난 1984년과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도 각각 100만 명, 65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여의도 광장에 모인 걸로 알려졌다.
여의도공원이 없어진 뒤 광화문광장과 서울시청광장에서 주로 대규모 집회가 열리지만 각각 1만3207제곱미터, 1만8840제곱미터 규모로, 합쳐도 여의도 광장의 1/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 세종대로와 태평로, 광화문4거리, 종로를 비롯한 차도는 물론 이면도로까지 인파로 들어차기 일쑤여서 면적 대비 참가자수 계산이 복잡해진다.
면적 기준 30만 명 이상... 유동 인원 포함하면 3배 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