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지난달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권우성
여자들로부터 '무시당했다'?가부장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를 체득해 여성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차별적 사고는 남자가 여자보다 대체로 물리적 힘이 더 세다는 사실에 기초해 '자연의 질서'인 것처럼 합리화되기도 한다. 고릴라나 오랑우탄이 사람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이 존재의 우위를 증명하지 않듯, 힘이나 신체구조가 남녀관계의 우위나 폭력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이탈리아와 한국 모두 '마초 문화'가 폭넓게 자리 잡고 있고, 그로 인해 여성들이 차별과 폭력에 고통받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한 나라는 그런 문화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바로잡으려 하는 한편, 한 나라는 아예 그런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여성 혐오'가 없다는 사회에서 어떻게 여성을 대상으로 한 학대, 폭행, 살인이 잇따르며, 어떻게 '안전 이별'이 신조어가 될 만큼 암담한 현실이 되었을까?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라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이를 갈 만큼 여성을 증오해야만 '여성 혐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여성혐오 범죄'로 인정 받으려면, 여성을 향해 폭발하는 혐오감을 극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면서 범행해야 하고, 이때 범인의 정신상태는 아주 온전해야 하며, 사후에는 범인 스스로 여성혐오자임을 자백해야 한다(경찰은 강남역 살인이 혐오범죄가 아니라면서, 범인이 여성혐오를 부인했다고 밝혔다).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살해'로 분류된다. '여성살해'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세계적으로 '혐오범죄(hate crime)'로 분류된다. 강남 살인사건 범인은 "여자에게 무시당해서 죽였다"고 진술했고, 실제로 기다리고 있다가 여자를 골라 범행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여성살해이고, 혐오범죄다.
범인은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여자를 살해했지만, 그는 살면서 남자들로부터 훨씬 많은 무시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들로부터 겪은 수모는 당연시하면서 여성들로부터 당한 수모만 기억했다. 명백히 차별적인 시선이고, 여성혐오적 태도다.
남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여자가 해주지 않으면 '무시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것'이나 '나와 성관계해 주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가정폭력이나 이별폭력 가해자들 가운데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을 보면, '학대'와 '사랑'도 구분 못하는 이들이 '혐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