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이 그린 나의 집건물과 가벽 사이로 비가 들이쳐 자고 일어나니 방이 물바다였다
한국여성민우회
"친구랑 같이 살았는데. 정말 둘이 딱 붙어서 자야 되는 넓이였거든요. 그렇게 좁은 덴데 한 달에 세금이 엄청 나오는 거예요. 한 층에만 9~10집이 사는 건물인데 계량기가 따로 있질 않고 층별로 있었어요. 계량기를 호수마다 따로 달려면 돈이 드니까 할 수 없다고 그냥 수용하라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전체 요금을 호수로 나눠서 낼 돈을 알려줬는데 내역을 안 알려주고 그냥 얼마라고 통보만 했어요. 근데 그 요금이 너무 비싼 게, 수도요금이 만 원 넘게 나왔거든요. 방 두 개짜리 지금 집도 수도요금이 그렇게는 안 나오는데, 그때가 1999년이니까 16년 전인데 둘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으니까 어이가 없는 돈이었죠."원룸에 살아본 세입자들은 누구나 한 번쯤 관리비에 대한 억울함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른 인터뷰이였던 아름(가명·만 38세)도 원룸에 살면서 매달 내역도 불확실한 공과금으로 10여만 원을 내야 했던 사례를 호소했었다.
아름은 당시 가장 큰 소망이 '전기와 가스요금이 분리된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만큼 불투명한 관리비가 낳는 억울함은 크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월세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매달 내역이 불투명한 비싼 관리비까지 내다 보면 이유없이 월세를 더 내는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태영이 16년 전에 처한 상황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태영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옆집에 알음알음 수소문을 해봤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자기들도 너무 비싸게 나온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전단지를 만들어서 가가호호 붙이고 언제 몇 호로 모여주세요! 반상회를 조직한 거죠. 그렇게 모여서 너무 비싸다 어쩌다 한바탕 같이 이야기를 하고, 내가 한전에 한 번 알아볼게요, 내가 수도사업소에 알아볼게요. 막 대책회의를 하고, 옆집 아줌마랑 친해지고, 앞 집 언니랑 술 마시러 나가고(웃음). 집주인은 주모자를 잡는다고 수소문을 해서 우리를 따로 부르고, 우린 뭐 어쩌라고? 그러면서. 근데 알아보니까 요금 총액이 맞기는 맞았어요. 호수로 나누니까 우리가 내는 세금이 나오긴 하더라고요. 근데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싸니까 여기 전기를 끌어다가 어디 다른데 쓰나, 수도가 뭐가 이상한 게 아닌 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어쨌든 확인은 한 거죠." 공과금 사건은 이렇게 의문 속에 일단락됐다. 하지만 반상회를 조직했던 저력은 이후에도 효과를 발휘했다. '여름 물바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태영은 집주인에게 다시 항의했다. 공과금 사건을 통해 태영이 호락호락한 세입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 집주인은 태영을 더 넓은 다른 방으로 옮겨줬다. 그러다 태영이 결국 더 못 살겠으니 나가겠다고 했을 때도 집주인은 계약기간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 위한 중개수수료를 요구하지 않고 바로 보증금을 내줬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계약기간 중 이사를 할 때,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 위한 중개수수료는 당연히 세입자가 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경우에 대한 법적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판례는 찾아볼 수 있는데, 판례에 따르면 오히려 집주인이 중개수수료를 내야 한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세입자에게 불리한 관행이 굳어져온 것이다. 태영은 '시끄러운 세입자'가 되어 그 관행을 깼다.
판례(서울중앙지방법원 제9민사부 98년 7월 1일 선고, 97나55316 판결) ◆ 다툼의 쟁점상가(점포)를 1년 기한으로 임차한 임차인이 영업부진으로 5개월 만에 나가겠다고 임대인에게 통지하였으나, 임대차 계약일로부터 9개월차 되는 시점에 새로운 임차인과 계약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임대보증금에서 중개수수료를 공제한 금액을 반환 받게 된 임차인이 임대인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의 소를 제기.◆ 판결 요점"중개수수료는 임차인이 부담한다는 특별한 약정이 없었다면 임대인이 부담해야 한다.""임차인과의 임대차 계약이 정상적으로 종료된 경우에도 임대인은 어차피 새로운 임차인과 임대차계약을 위해 중개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므로 전 임차인이 중개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볼 수 없다.""독한 집주인들을 거치면서 생존력이 쌓인 거죠"사실 태영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은 한 둘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집주인에게 말해봤자 안 먹혀서', '실랑이 하느라 에너지 쏟는 게 싫어서' 그냥 참고 만다. 태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태영은 어떻게 그런 피로와 좌절감을 이기고 집주인과 정면돌파를 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전 처음에는 집주인들한테 말도 못 꺼냈어요. 그 반상회 조직한 것도 사실 그때 같이 살았던 친구가 주도적으로 했던 거예요. 그때 나는 독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좀 무섭기도 하고 어리바리했거든요. 근데 나중에 혼자 살게 되면서 목소리를 안 내면 결국 내가 억울해진다는 걸 느낀 거죠. 집주인들은 아무것도 해주지도 않으면서 내 사생활은 쉽게 침해하곤 하니까요. 독한 집주인들을 한 명씩 거치면서 이런 마인드가 생긴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거 좀 고쳐주실 수 있어요?'라고 물었는데 나중에는 '(귀여운 목소리로) 수리는 일단 제가 하는데 원래 이거는 설비에 해당하는 거고 노후해서 고장난 거니까 수리비는 월세에서 빼고 부칠게요. 괜찮죠?'(웃음)라고 말했어요." 세입자들이 많이 겪는 고충 중 하나가 집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집주인이 수리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태영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궁금했다. 질문을 던지자 태영은 그동안 겪었던 상식 밖의 집주인들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이사 갈 때 방충망에 작은 구멍이 두 개 뚫린 걸 보고는 방충망을 물어내라는 거예요. 그 방충망이 이사 올 때부터 그물망이 떠 있어서 아래가 뚫려 있었거든요. 그걸 제가 막아서 썼는데 이제 와서 구멍 두 개 뚫린 걸 보고는 물어내라는 거예요. 끝까지 안 주려고 했는데 집주인이 막판에 전세금 돌려주면서 그 방충망 교체한 비용을 떼고 입금을 해버리더라고요. 또 세면대 밑에 U관 있잖아요. 그게 녹이 슬어 있고 아래가 헐거워져서 물이 샜거든요. 그건 오래 쓰면 녹이 슬고 낡는 거잖아요. 난 당연히 집주인이 해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쳐달라고 했더니 그런 건 소모품이니까 세입자가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아니 그러면 소모품 아닌 게 뭐예요? 창문도, 벽도, 바닥도 닳는데 말이에요. 이사 올 때 장판이랑 벽지도 제가 새로 했는데, 집주인은 그 배수관 낡은 걸 안 고쳐주겠다는 거예요."계약서에 특약을 넣을 수 있다이런 집주인들을 거치면서 태영에게 생긴 노하우가 하나 있다. 계약서를 쓸 때 집수리에 대한 특약을 꼭 챙기는 것이다.
"계약서 쓸 때 특약을 넣을 수 있어요. 집 설비 부분이 노후로 고장 나거나 그런 부분은 집주인이 부담하며 어쩌고 그런 조항을 요구해서. 구체적인 예를 다 쓸 수도 있어요. 내가 집세를 냄으로 인해 집주인에게는 수익이 생긴 거고, 그 전보다 나한테 올려받은 만큼 집주인 넌 뭘 해줄 건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이번 집 계약할 때도 바닥이 너무 꺼진 데가 많다고 방 꺼진 데 보수 해달라고, 대신 도배 장판은 내가 하겠다고 특약을 넣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