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 대학생 전세임대제도 홍보물 중 일부진현에겐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이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
2011년 겨울에 다섯 번째 집을 떠날 수 있었던 건 LH에서 시행한 '대학생 전세임대'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전세임대'로 집을 구하기는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제가 집을 보고나서 LH에 심사를 올려요. 그럼 LH가 자체 기준으로 심사를 해서 이 집은 얼마까지 지원이 가능하다고 알려줘요. 그런데 그 감정가가 실제 전세금보다 대부분 적은 거예요. 실제 전세는 5500만 원인데, 감정가가 3500만 원이 나오면 2000만 원이 모자라잖아요. 그럼 계약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건물주는 한 명인데 세입자가 여럿 있으면 다른 집 집세를 다 적어내야 했어요. 집주인들이 당연히 싫어하죠. 또 그 심사가 2~3일 걸렸거든요. 기다리는 것도 집주인은 싫어하고, 심사하는 사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이미 계약이 되기도 하고. 그리고 불법 개조를 한 건물이면 애초에 심사에서 탈락이에요. 서울에 불법 개조를 안 한 집이 거의 없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명륜동에서 종로5가까지 내려오면서 거기 있는 전세 매물이란 매물은 거의 다 봤는데도 LH에서 허가가 나는 집이 없었어요. 거의 30번은 '빠꾸'를 먹었어요."매일 새 집을 보고, 심사를 넣고 기다리는 동안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현은 집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몇 달 정도만 더 살 수 있을지 물었다. 집주인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집주인은 말을 바꾸었다. 벌써 다음 세입자를 구했으니 기한에 맞춰 나가라는 것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런데 집주인이 갑자기 보증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월세를 덜 냈으니 그걸 빼고 보증금을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진현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불안정하게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월세가 한두 달 밀려 한 번에 내기도 했지만 안 낸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보증금을 다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 진현은 마음이 급해졌다. 누군가에겐 '그래봤자 100만 원'이겠지만 진현에게는 1~2만 원이 귀했다. 부동산과 법률구조공단을 찾아 다녔다. 상황은 나빴다. 어쩌다보니 진현은 그 집에 전입신고를 안 한 상태였던 것이다.
임대차보호법은 세입자에게 '대항력'을 부여해 세입자를 보호한다. '대항력'은 집주인이 바뀌거나 집이 경매에 넘어가도 세입자가 계약 기간 동안 거주할 수 있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손실 없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게 해주는 권리다. 단 대항력은 집을 '점유(이사)'한 뒤 '전입신고'를 해야 생긴다. 전입신고를 안 한 진현은 법적으로 따져도 보증금을 보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은행에서 특정 계좌 이체 내역만 뽑을 수 없어서 2년치 이체 내역을 다 뽑았다. 일일이 보며 낸 월세를 체크하고, 정리하고, 또 집주인을 만나 실랑이를 하고. 그러다 집주인은 진현이 공과금을 안 내서 대신 낸 적이 있다며 그걸 빼고 보증금을 주겠다고 했다. 험한 소리가 오갔고 진현은 지쳐갔다.
"멘탈이 산산이 부서졌어요. 집주인하고 싸우는 것도 이제 지치고. 보증금만 다 돌려받을 수 있으면 나가라는 날짜에 그냥 나가야겠다 했어요. 다음 집은 안 구해졌지만 노숙을 하더라도 그냥 그래야겠다. 통보받은 이사 날에 짐을 반쯤 싸놓고 집주인을 기다렸어요. 혹시 몰라서 키가 190인 고향 친구를, 남자애를 불러 놨고요. 보증금 받으면 짐을 빼겠다고 하니까 집주인은 짐을 빼면 보증금을 주겠다고 하고. 각서를 쓰면 주겠다고 하길래 영수증을 써줬는데 그것만 쏙 채가면서 돈을 안 주려고 하고. 경찰을 부른다 어쩐다 그날도 난리를 치는데, 그 고향 친구가 가만히 있다가 그때 딱 일어났어요. 그 할아버지를 탁 막으면서 '이러지 말고 그냥 주시죠.' 한 마디 했어요. 그랬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는 거예요."집주인과의 잦은 실랑이로 다친 마음집주인은 진현에게 세상이 '나이 어린', '여자', '세입자'를 어떻게 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많은 비혼여성들이 집을 구하고 또 살아가는 동안 공인중개사나 집주인에게 '세입자'이면서 '비혼여성'이라는 이중 약자 취급을 당한다. 내 존재 자체가 약점이 된다는 것을 감지할 때, 그 무력감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애와 분노로 존재를 잠식한다. 진현은 지치고, 마음을 다쳤다. 그리고 노숙이 시작됐다.
방학이라 자취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고향에 내려가 있어서 신세 질 곳도 마땅치 않았다. LH에서 제시한 신청 기간 내에 심사를 통과하는 집을 못 찾으면 자격 자체가 무효가 되기 때문에 진현은 고향에 내려가 있을 수도 없었다. 낮에는 계속 새로운 집을 알아봐야 했기때문이다. 하루는 PC방, 하루는 찜질방, 술집에서 밤을 새기도 하고 벤치에서 자기도 했다. 공원 벤치는 으슥해서 사고가 생길까봐 대로변의 벤치에서 잤다. 12월, 한겨울이었다.
진현의 노숙은 3주간 계속됐다. 그 3주의 노숙은 그 해 처음으로 시행되었던 '대학생 전세임대' 제도의 허점과 '집보다 더 문제였던 집주인'의 합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단지 공무원들의 시행착오나 특별히 나쁜 집주인 개인을 탓할 문제만은 아니었다.
진현의 노숙은, 누군가 현재 주거복지제도의 한계와 세입자의 열악한 사회적·법적 지위가 겹쳐진 주거 사각지대에 놓였을 때, 이 사람이 비공식적 사회안전망인 가족과 친지를 동원할 수 없다면 결국 어디에서 잘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