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노년의 관상은 눈가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처럼 부채살 같이 온화한 눈주름이 생기고 지금의 눈빛이 흐려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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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엄마는 식구들의 사주도 종종 보았는데 가끔 내 손을 잡고 남몰래 우셨다. 내 사주가 초반에 잘 못 먹고 오래 못사는 고비가 있고 그 고비를 넘기면 말년에는 잘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하고 오래 못 산다는것을 유념하면서 바짝 긴장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20세가 되면 '30세까지 살까?', 30세가 되면 '40세까지 살까? 50세까지 살까?' 생각했고, 50이 넘은 지금도 나는 '60세까지인가?'하고 가끔 어리석게 꼽아본다.
관상과 사주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참고하면 내가 걸어가는 삶의 길에 유용한 거름도 되는 것 같다. 잘 못 먹는다는 것이 가난해서 못 먹는 것보다 신체적인 위장의 허함으로 소화를 잘 못하는 것이나 그것을 보완하면 별 탈이 없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는 거였다. 마찬가지로 오래 살든 못 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이 시간을 잘 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내 마음을 최대한 평화롭게 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늘 입술에 미소를 지으려 노력한다. 사람들과 미팅하기 전이나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화장실이나 차 안에서 어릴 적과 똑같이 볼펜이니 종이를 물고 노래를 하거나 거울을 보면서 안색을 펴는 눈 운동 눈썹 운동, 입 운동을 한 후에 들어간다.
그런데 웃지 않고 얼굴이 경직되었을 때도 사람들이 간간히 오해를 하더니 이제는 늘 웃어도 오해를 하는 일들이 또 생긴다. 속상해야 하는 어떤 상황에서 표정이 어둡지 않고 밝으니 '사오정'이란 놀림을 받기도 하고' 비웃는 건가요?' 하는 오해도 받는 것이다.
얼굴 표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어릴 적과 얼굴 표정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지금의 나 사이에는 40여 년의 세월 간격이 있다. 그러나 그 세월과 무관하게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존재는 그냥 그대로 안녕히 세월의 줄타기를 타고 있고, 사람들도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자유롭게 착각하고 있다. 그 세상살이가 나는 여전히 신기하고 신비하다.
유달리 어둡고 경직된 나의 관상 덕분에 나는 심상의 세상에 눈을 떴고 그것이 참 감사하다. 만약 내 관상이 유달리 좋았다면 나는 심상을 모르고 보이는 형상의 세상에 집착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사주대로 요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바라는 노년의 관상은 눈가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처럼 부채살 같이 온화한 눈주름이 생기고 지금의 눈빛이 흐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입술 운동을 하지 않아도 입이 저절로 백일이나 돌된 아이나 문수동자상처럼 이래도 저래도 잘 웃었으면 좋겠다. 심상은 "당신이 있어서 오늘 나도 기쁩니다"하는 내 살아있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잘 전해지면 바랄 바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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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에 연필 물고, 귓볼엔 빨래집게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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