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날인 2013년 5월 1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열린 제1회 알바데이 '알바도 노동자다'에 참가한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최저임금 1만원'을 배경으로 아르바이트 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2004년 1학년을 마치고 군에 다녀온 뒤, 집안 사정으로 제때 복학하지 못했다. 학자금대출을 추가로 받을 여력도 안 됐고, 휴학을 연장하던 중에 결국 학교로부터 제적당하고 말았다.
청년 실업률이 전체 실업률의 2배가 되는 현실에서 고졸 신분으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더욱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20대의 초반은 열정과 의지로 큰 문제없이 버텨낼 수 있었다. 군대를 막 다녀온 뒤 얻은 '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육체노동도 망설임 없이 해냈다.
문제는 20대 후반에 찾아왔다. 더 이상 내가 열정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체력이 금방 회복되는 스무 살로 평생을 지낼 수 없으니, 언제까지 육체노동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0대 초반에는 면접 때마다 젊어서 좋다며 반기던 인사담당자의 표정은 이력서 나이 란에 적힌 숫자가 늘어갈수록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대학교는 왜 졸업하지 않았느냐"는 질문 하나는 늘 한결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딱 거기까지였다.
군대를 전역한 직후에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흔히 '막노동'이라 불리는 공사장 일도 했고, 하루 방문 고객이 1천 명 이상 되는 기차역의 푸드코트 주방에서 접시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군대도 다녀왔는데 이 까짓 거" 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수천 개의 접시를 닦았고, 여름철 땡볕 아래에서도 헬멧을 쓴 채로 공사 자재를 운반했다.
대학 복학에 실패한 이후 구미에 위치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700도 이상 고온으로 가열된 알루미늄을 가공하여 휴대폰 케이스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일이 워낙 위험하고 힘들어서 100여 명 남짓 되는 인원 중에서 20대는 나를 포함해서 2명뿐이었다. 밤낮없이 주야교대로 근무하면서 피로에 쓰러져 잠들곤 했다. 일하고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나의 삶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6개월을 일하다가 오른손 손가락 2개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겪고 끝내 공장을 떠나게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내 손으로 직접 벌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기분 좋은 일의 끝은 조금 허탈한 것이었다.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은 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로 떠났다.
돌아갈 학교도 없고,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둔 스물넷의 젊은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 땅에서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던 터라 정착 초반에는 여전히 막노동과 청소 일을 했다. 그러나 반년 뒤에는 어느 정도 영어 실력이 늘어서 카페에서도 일하고, 한국 제품 광고들을 주로 다루는 광고지 인쇄 업체에서도 근무했다.
고졸 구직자에게 '눈 낮추라'는 말뿐인 이 나라
호주 생활이 정말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는 비자를 연장하여 2년간 지냈다. 최저임금이 한국의 4배 가까이 높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숙식은 물론 취미 생활을 즐길 여유까지 생기는 환경도 매우 좋았다. 여성의류업체 창고에서 그리스인 사장 밑에서 1년 가까이 일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일과 일상의 조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2010년에 귀국한 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호주에서 다들 아이엘츠나 토익 등의 영어시험을 준비하며 스펙을 쌓을 때, 나는 벌어서 모은 돈을 모두 여행을 다니는 일에 썼고 영어공부는 독학으로 했기 때문이다. 세계 10대 자연경관 중에서 3곳이나 꼽힐 정도로 경치가 좋은 호주에서 더 많이 둘러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돈을 모으고 토익 점수를 따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처음엔 군대를 다녀왔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호주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딴 세상에서 혼자의 힘으로 꿋꿋이 버텨낸 경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의지가 충전된 상태였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호주에서 늘린 영어 실력은 어느 알바를 하든 외국인에게 간단한 안내가 가능한 회화 능력을 주었지만, 토익점수로는 800점으로 환산될 뿐이라 구직 활동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