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최경환 원내대표가 2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남소연
우리 사회가 1987년 6월항쟁과 뒤이은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경로를 걸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민주화 운동의 핵심적 요구는 선거의 복원, 즉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의 민주적 정당성 복원이었다.
국가 통치세력이 가지는 민주적 정당성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선출과정의 민주적 정당성이다. 민주주의 이론의 권위자인 로버트 달은 대표의 선출, 자유롭고 공정한 주기적 선거, 표현의 자유, 대안적인 정보 원천, 결사의 자유, 모든 정치공동체 구성원을 포괄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것은 한 정치공동체의 민주적 정당성을 자유롭고 공정한 국민의사의 형성과, 이로 인한 대표의 선출로 보고 있는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이전이 민주적이지 않다고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 민주적으로 대표를 선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 역시 극도로 억압되었으며 국가권력의 언론통제로 인해 대안적인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경로 역시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결사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으며 반공독재이데올로기에 근거해 모든 정치공동체를 인정하기도 않았다. 따라서 1987년 6월항쟁에서 선출과정의 민주성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물론 6.29선언 이후에도 선출과정의 민주성이 제대로 보장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각종 선거관련법의 불합리함은 물론 여전히 국가권력은 각종 정치적 이벤트를 통해 여론조작에 힘썼고, 무엇보다 지역이데올로기를 동원해 국민의사의 왜곡을 시도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선출과정의 민주적 정당성이 어느 정도 복원된 시점은 1997년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의 등장 이후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선출과정의 공정함만을 묻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공정하게 선출된 정권이라 할지라도, 선출 이후의 통치과정에도 민주적 정당성이 있느냐를 묻는 것까지 나아갔다.
한국사회에서 선출과정의 민주적 정당성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면, 2008년 촛불은 바로 통치과정의 민주성 문제를 제기하는 시도였다. 절차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었던 이명박 정부였지만, 촛불들이 거침없이 '이명박 정부 퇴진'을 외쳤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한미FTA의 선결조건으로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수용하면서 온 국민의 반발을 불러왔다. 국민들의 반대 의사가 명확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수입을 강행하려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저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는 통치과정의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성격이 컸다.
국가 기관의 총체적 대선 개입, 민주주의의 분명한 후퇴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선출과정의 민주성마저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점에서, 우리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심각하게 후퇴시켰다.
물론 댓글 공작을 통한 여론 조작 시도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2003년 7월 'i-한나라 추진기획단'을 꾸리면서 사이버 공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최병렬 대표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사이버 전사 1천명 양성론'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심각성은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과 군이 국내정치 개입 금지라는 민주주의 최소 합의선을 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활용해 그 실체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규모 여론조작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2012년 대선은 여당 후보와 야당 후보가 박빙의 선거를 펼쳤기 때문에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진 대규모의 여론조작의 심각성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실체를 밝히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드러난 의혹만으로도 '대선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일 이런 일이 1997년 대선이나 2002년 대선에서 일어났다면, 이 나라의 자칭 '애국보수'들은 잠자코 있었겠는가? 문제는 이런 '당연한' 항의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다. 대선과정의 불만과 의문을 해소할 방법은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법적 판단밖에 없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명백한 실체를 드러내고 대선개입 정도를 가늠하며,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운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은폐와 부인, 또 다른 조작과 왜곡으로 대응했다. 게다가 국정원 대선개입사건과 관련 검찰총장을 비롯해 수사팀장까지 물러나게 만드는 악수도 뒀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법리판단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게다가 불법적인 선거개입을 의심받고 있는 국정원은 남북정당회담 녹취록 논란과 소위 이석기 의원의 '내란예비음모' 사건을 주도하면서 여전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재발 방지'만이라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조차 주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선출과정의 민주적 정당성이 심각하게 의심받는 정권이 통치과정, 즉 문제해결 과정에서도 전혀 민주적 정당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종류의 민주적 정당성이 모두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대선에 불복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