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순안공항에서2005년 10월 처음 평양에 갔을 때 순안공항에서 찍은 사진이다. 천주교 '작은 형제회' 석일웅 수사, 지금은 고인이 되신 권태하 선생과 함께.
지요하
이 글들이 <오마이뉴스> 지면에 발표되는 동안 주변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다. 50대들이 주축을 이룬 상조회 모임 자리에서는 재미있는 언쟁도 있었다. 내 글들을 읽지는 않고 누구에게서 내 방북 사실을 전해들은 한 후배가 술 취한 소리로 "남한 사람들이 대규모로 평양을 가는 것은 김정일을 도와주는 짓일 뿐"이라는 말을 해서, 그 후배와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내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북한 김정일에게 갖다 줄 돈이 있으면 우리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라"고 제법 점잖은 소리로 충고를 하는 이도 있었다. "괜한 전화로 시간 허비하지 마시고, 그 시간을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세요"라고, 나도 점잖은 소리로 충고를 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전화도 있었다. 태안군 이원면에서 산다는 한 농민은 내게 <평화3000>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고 싶고, 평양에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나는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그에게 <평화3000>에 참여하는 방법을 잘 알려주었지만, 그는 아직 방북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나는 2004년 9월 <오마이뉴스> 지면에
<너희가 '친북'의 의미를 아느냐?>라는 제목의 글을 두 개 쓴 적이 있다.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에 대해 '친북'이라는 말로 매도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접한 나머지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는 것은 친북 세력보다 오히려 수구 반공세력임"을 역설하는 내용의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북한의 독재체제는 남한의 반공세력 덕을 보았고, 남한의 군사독재 정권은 북한의 세습독재 덕분에 반민주 정권의 기반을 공고히 해온 사실을 갈파하는 글이기도 했다.
그 글이 나간 후 심한 전화폭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가 직접 전화를 받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고, 내 노친이 전화를 받아 오히려 노친 쪽에서 큰소리로 야단을 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종북'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범람하지 않았다. '친북세력'이라는 말이 간간이 나돌았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갑자기 '종북'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종북몰이니, 종북사냥이니 하는 말까지 생겨나서 우리 사회를 가장 효율적으로 압제하는 말이 됐다.
대체의학에 관한 정보 나누기2009년 6월, 당시 86세였던 모친이 폐암말기 진단을 받고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때부터 나는 대체의학을 시행하면서 '간병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노친은 암세포가 골반으로 전이되었고, 골반의 암세포가 확장되면서 바로 그 부위가 골절되어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다시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 한 달을 지낸 다음 우리 고장의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모친은 입원 8개월만인 2010년 7월 5일 완쾌되신 몸으로 퇴원했다. 말기 폐암도 나았고, 골반의 암세포도 퇴치되었다. 엉덩이뼈의 골절은 단순 골절이 아니었다. 암세포가 확장되면서 바로 그 부위가 골절된 것이기 때문에, 그 뼈가 다시 붙는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