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현대차 울산1공장에서 농성을 벌이던 비정규직들이 농성 현장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박석철
공장점거 농성이 시작된 지 5일째 되던 2010년 11월 20일, 민주노총은 오후 3시부터 '민주노총 영남권 결의대회'를 열었다. 나는 이 현장을 취재했다.
결의대회가 무르익던 오후 4시 20분께, 현대차 울산공장 정문 앞에 마련된 임시무대 위로 갑자기 한 남성이 뛰어올라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불은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졌고, 남성은 무대 밑으로 떨어졌다.
당시 나는 무대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서 민주노총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급히 무대쪽으로 달려가니 주위에 있던 집회 참가자가 이미 불을 끈 뒤였다. 사람들은 분신자의 옷을 벗기는 등 응급조치를 했다. 이후 그는 119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분신한 사람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황인화(당시 34)씨. 그는 현대차 하청업체인 드림산업 소속으로 일했다. 그는 11월 15일 공장점거 때 조합원들과 함께 농성을 시작한 후 노모가 아프다는 소식에 17일 아침 공장을 나왔다. 이후 회사 측의 저지로 다시 농성 현장에 합류하지 못해 갈등을 겼었다. 3일 뒤인 20일 오후, 그는 분신을 선택했다.
황씨는 얼굴과 목, 가슴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전해졌다. 이후 나의 머리에서는 '왜 분신을 택했을까. 분신을 결정하기까지 심적인 갈등은 어떠했으며, 그 후의 고통을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분신하면 얼마나 아플까?분신 다음날인 2010년 11월 21일, 병원에서 그를 지키고 있던 한 비정규직 조합원과 전화통화를 했다. 아들 소식을 듣고 황씨의 모친이 병원으로 달려온 날이다.
동료에 따르면 그날 황씨는 "엄마 걱정하지 마. 협상한다고 농성 풀면 안 돼. 6개월 농성하면 우리가 이긴다"며 "농성장이 너무 추우니 침낭 꼭 넣어 줘"라고 노모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황씨는 "친구들이 보고 싶다. 농성장을 꼭 지켜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후 황씨의 분신은 많은 이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그의 분신에도 현대차 비정규직들은 정규직 전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회사 측이 제안한 "비정규직 모두 정규직 전환이 아닌, 3000명 신규 채용"을 두고 비정규직은 분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황씨의 분신 시도 2년 5개월 뒤인 2013년 4월 16일 오후 3시, 이번엔 기아차 광주공장 비정규직노조 김아무개(36) 조직부장이 역시 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했다. 급히 <오마이뉴스>에 관련 기사를 송고하는데, 문득 황인화씨가 생각났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었던 그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동안 품어왔던 궁금증도 풀고 싶었다. 한편으론 '그날의 악몽을 되살리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도 앞섰다.
많이 우려했지만 황씨는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2013년 4월 17일, 황씨를 만났다. 예상과 달리 화상 흔적은 많이 남지 않았다. 그는 밝고 쾌활했다. 특히 그는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여자친구, 장모가 될 분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여자친구가 볼에 뽀뽀를 하자 익살스런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분신할 당시 겁이 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10년간 싸우는 동안 회사가 얼마나 독한지를 알기에, 내가 선택할 길은 분신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분신할 때 그 아픔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아픔이었다"고 말했다.
평범한 청년인 그는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한다. 지금 마음도 분신할 때와 똑같다.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는 비정규직이 왜 차별을 받아야 하나"라며 "차별은 사람의 존엄성마저 파괴한다"고 분신 시도 이유를 밝혔다. 그는 짦은 만남을 뒤로한 채 다시 일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