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애인
강미애
내가 자라던 1970~90년대는 새마을운동, 녹색운동, 백색운동 등으로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역사의 격동기였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에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으며 오남매 중에 둘째 딸이었던 나를 불러 고사리 같은 손을 만져본 뒤, 어머니께 "잘 키우라"는 한 마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그 이후에 간간이 한숨을 토해내며 살아온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들을 들었다. 내가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바르게 살아오게 되었던 것은 서른다섯 살에 요절한 아버지의 짧은 삶 속에서도 부부 간의 신뢰와 깊은 사랑을 나누고 살았던 부모님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어머니께 "아버지 돌아 가시고 난 후에 왜 재혼을 안 하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네 아버지보다 더 멋있는 남자를 내 평생에 만난 적이 없었어" 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아버지는 밤마다 어머니를 찾아와 사랑을 나누고 갔다고 한다. 그 이유로 어머니는 심신이 쇠약해져서 급기야 할머니가 무당을 불러 죽은 아버지의 영혼을 멀리 구천으로 보내고 난 후에 어머니가 건강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할머니가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자, 세상을 살면서 해볼 것 다 해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자신의 어머니를 달래고 죽음을 당당히 맞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사냥용 총으로 노루를 잡아 오셨던 아버지 모습과 레코드 판으로 노래를 틀어놓고 우리들에게 춤을 추게 하고 당신은 기타를 치던 아버지 모습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살았던 1960년대에는 한국전쟁을 치른 직후라 그런지 길거리에는 거지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당시에 진주에 있는 한전을 다니셨는데, 매일 출근할 때마다 어머니께서 점심값을 드렸는데도, 거지들이 찾아와 구걸하면 점심값을 모두 주고 본인은 굶고 집에 오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던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하던 양장점 앞에 다 떨어진 헌옷을 걸친 소년이 추위에 떨며 깡통을 들고 와서 밥 좀 달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그 아이를 측은히 여겨 "시골에 가서 농사일 돕고 살면 밥 배불리 먹고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는데 그렇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한다.
그 소년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서, 아이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 깨끗이 씻기고 옷을 얻어다가 입혀서 시골에 사는 할머니 댁에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그 소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우리 집안에서 큰 농사를 짓는 머슴으로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