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유적지인 옛 제14연대(현재 한화여수공장)는 수상비행활주로였다. 일제시대 호남의 곡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이곳은 현재 방치돼 훼손이 심각한 상태다.
주철희 제공
"나서면 다친다, 나서면 죽는다, 나서지 마라."
나서지 말고 중간만 가라는 여수지역 부모들의 가르침은 1948년 일어난 여순(여수·순천)사건에서 살아남은 자의 삶의 지혜였다.
여수는 반도(半島)다. 일제강점기에 반도는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도에서 지역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여수는 곡창지대였던 호남의 곡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수탈의 전진기지였다. 그래서 이곳엔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순사건 65주년, 아직도 청산되지 않는 아픈 역사해방 후 여수는 또한 '국가폭력'에 가장 참혹한 피해를 당한 곳이다. 일명 '여순 반란사건'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를 시작으로 군부가 지배하던 시절 여수시민들은 철저히 '빨갱이'로 몰렸다. 이로인해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처참히 죽었다. 연좌제에 내몰려 제대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진실규명은 철저히 외면 받고 있다. 도대체 왜 일까?
올해로 65년을 맞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정부 진압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민 등 수천명이 숨진 사건이다. 정부는 그해 벌어진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4연대 소속 김지회, 홍순석 등의 군인들이 전쟁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수를 요구하며 제주도 투입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여순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1948년 10월 19일 오후 8시경 봉기가 시작되었다. 오후 10시경에는 14연대를 모두 장악했다. 이들은 여수시내로 진격했다. 20일 새벽 여수 경찰서와 시내 주요 기관을 모두 점령한다. 또한 곧바로 순천으로 진격 20일 오후 2시경 순천을 장악한다. 반란은 여수를 시작으로 전남동부지역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27일 여수를 마지막으로 8일간의 봉기는 막을 내린다.
이승만 정부는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10월 22일 진압군을 투입해 23일 해군 LST함이 여수앞바다 선상에서 시내를 향해 무자비한 박격포 공격을 시작했다. 26일 대한민국 국군 육해공 합동작전이 진행됐다. 이로 인해 27일 오후 여수를 탈환했지만 시내는 불바다가 됐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이후 진압군은 대대적인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시내 주요 5곳(서초, 동초, 종산초, 진남관, 공설운동장)에 시민들을 집결시켜 놓고 좌익과 우익으로 분류했다. 머리 짧은 사람, 군용팬티를 입은 사람, 손에 기름기 뭍은 사람 등을 협력자로 몰아붙였다. 이때 그 유명한 '손가락 총'은 여수사람들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좌익혐의가 의심돼 손가락 총에 맞으면 즉결심판에 처해졌다. 또 좌익으로 의심되는 아들의 행방을 캐기 위해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뺨을 때리고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뺨을 때리는 추악한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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