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고한읍 풍경. 석탄먼지 때문에 출장을 한번 다녀오는 날이면 흰 셔츠는 까맣게 변하곤 했다.
신광태
"네 꿈이 뭐니?" "난 다음에 커서 술집여자가 될 거예요." 그 시기에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린이 놀이터를 찾았다. 다섯 살 남짓한 여자아이 혼자 그네 타는 게 눈에 띄었다. 얼굴은 땟국물로 얼룩졌고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가늠키 어려웠다. 당시 탄광마을 아이들의 부모는 대체로 맞벌이였다. 아버지는 탄광 막장에 들어가고, 어머니는 밖에서 탄을 고르는 채탄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오갈 데 없이 놀이터나 공터를 배회하는 아이들이 흔했다.
"너도 나만큼 심란하겠구나"하는 생각에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꿈이 뭔지를 물었는데, 뜻밖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어른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 탄광촌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다보니 아이에게 많은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한 번도 도시에 나가보지 못했다는 그 아이에게 화장을 진하게 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술집 여성들이 천사처럼 보였나보다. 아이가 하도 진지하게 말했기에 웃을 수도 없었다.
탄광촌에는 유독 술집이 많았다. '인생 막장'까지 왔다는 생각에 일 마치고 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는 광부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우후죽순처럼 술집들이 생겼고, 업소에서는 경쟁적으로 여성들을 채용했다. 아이들에게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익숙한 존재였다.
아내에게 '스파이' 일을 시키다니고백하자면, 당시 내 담당업무는 탄광 노동자 동향파악이었다. 광부들의 농성에 대비해 사전에 동향을 파악해 군청에 보고하는 게 내 업무였다. 1980년대 말 당시, 각급 도청에는 지방과가 있었고 시-군에는 내무과라는 부서가 있었다. 이들 부서의 업무 중 동향파악은 그 비중이 컸다.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농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게 당시 정부의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동향파악 업무는 담당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상부의 수직적 명령에 의해 담당자가 정해졌다. 그 일이 내게 주어졌다. 결국 인쇄소에 들러 유인물을 수거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게 내 일이었다. 위험인물로 분류된 사람들의 집 앞에 몰래 숨어 있다가 그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보고하는 것 또한 내 일이었다. 광부들의 파업 등 농성이 있기 전에 관련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면 상부로부터 심한 욕설과 무능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스파이'를 하나 만들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행히 지금의 아내가 당시 큰 탄광회사 전산실에 다녔다. 슬쩍 제안했다.
"버스 타고 출퇴근 하면서, 광부 아저씨들이 하는 말 메모했다가 나한테 알려줄래?" 아내는 죽기보다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다.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예상동향'를 만들어 보고했다. 몇 번 적중했고, 장관 표창 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 이제 이런 거 안 할래!" 자신이 내게 언급한 사람이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는 "도저히 이런 거 못하겠다"고 울먹였다. "내가 대체 뭔 짓을 하는 건가"라는 회의가 일었던 게 그 시기였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란 생각을 할 즈음 화천군으로 발령이 났다.
집에서 쫓겨난 처남, 그 이유가..."매형, 나 고한에 살 때 집에서 쫓겨난 거 아세요?" 몇년 전, 처남은 묻지도 않은 말을 말했다. 이야기는 그의 중학교 2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어머니(지금 내 장모님)는 그에게 200여 장의 연탄을 부엌으로 옮겨달라고 말했다. 집이 골목길 안쪽에 있기에 500여 미터 떨어진 큰길에 쌓인 연탄을 나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남은 5000원을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어머니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2시간 동안 그 많은 연탄을 집으로 다 나른 뒤 처남은 어머니에게 당당히 5000원을 요구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따가 줄게"를 되풀이하며 돈을 주지 않았다. 화가 난 처남은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집에 옮겨놓은 연탄을 다시 500여 미터 떨어진 큰길가로 옮겼다. 결국 처남은 집에서 쫓겨나 3일 동안 친구들 집을 전전해야 했단다.
처남은 친구들 부모님이 눈치준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귀가했다. 장모님의 귀가 조건은 5000원 포기였다.
"하긴 연탄을 다시 길에다 옮겨 놓았으니 맞아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죠."상전벽해, 그 많은 광부는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