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제문> 원문을 담고 있는 연산군 4년 7월 17일자 <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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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어떻게 사화로 비화됐나그런데, 이 당연한 글은 40년 후에 연산군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악용됐다. 꿈을 꾼 지 얼마 뒤 김종직은 대과에 급제했고, 구세력에 맞서 개혁을 추구하는 사림파의 리더로 성장했다. 그가 개혁세력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다가 죽은 지 6년 만에 <조의제문>은 정국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김종직이 주로 활약한 성종시대에 신진세력인 사림파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춘추관 같은 사법 혹은 학술 기관을 장악했다. 반면에, 구세력인 훈구파는 이·호·예·병·형·공조 같은 일반 행정기관을 장악했다. 실권은 여전히 훈구파의 수중에 있었지만, 사림파 역시 사헌부 등을 통해 구세력을 공식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긴장 관계 속에서 김종직이 1492년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년 뒤인 1495년에 성종 임금이 죽었고, 아들 연산군이 새로이 주상의 자리에 올랐다.
참고로, 대부분의 논문이나 백과사전에서는 성종이 1494년에 죽었다고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날짜는 성종 25년 12월 24일 즉 1495년 1월 20일이다. 음력인 성종 25년은, 양력으로 하면 1494년 2월 6일부터 1495년 1월 25일까지다. 성종 25년이 '주로' 1494년에 걸린다는 점만 생각하고 그것이 1495년에 걸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왕이 된 연산군은 관례에 따라 아버지 시대의 역사서인 <성종실록>의 편찬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여당인 훈구파에게 좋은 먹잇감이 떠올랐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평소에 축적한 자료를 사초(史草)라고 부른다. 이것을 바탕으로 실록이 편찬되었다. <성종실록> 편찬을 맡은 훈구파는 사초 수집과정에서 <조의제문>이 적힌 사초를 발견했다. 그것은 김종직의 제자인 사관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였다.
<조의제문>은 문구만 놓고 보면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글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글을 불온문서로 몰아세우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훈구파는 '초나라 의제는 노산군(단종 임금)을 상징하고, 그를 추모하는 것은 세조(수양대군)를 비난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