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2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신청사 집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마을공동체가 '한국형 복지국가의 핵심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성호
- 늘어나는 아동 성범죄, 자살, 빈곤, 청소년 문제에 '마을이 묘약'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달라."저출산, 이혼, 독거노인, 사교육비, 주거 불안, 실업, 양극화, 성폭력까지, 한국사회의 수많은 모순이 드러나고 있다. 끝없이 CCTV를 설치하고 학교와 지하철에 보안관을 두지만, 표면적인 대응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막아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원적인 치료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공동체 정신이다.
예전에는 친구 집에서 놀다가 저녁 먹고 가고, 숙제하다 졸려서 잠들면 그 집에서 재워 보냈다. 그러면서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교육을 받았다. 간디가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말한 게 이런 경우다. 지금은 집집마다 국영수 공부하기에 바쁘고 학원만 왔다 갔다 한다. 삶과 동떨어진 지식의 편린만 갖게 될 뿐, 공동체가 가진 지혜를 전수받을 기회가 없다.
그러다 보니 어른이 돼도 어른의 역할을 못하고, 인간관계를 제대로 꾸려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별일 아닌데 이웃 간에 멱살 잡고 싸우는 일도 많고, 요즘은 '동네아저씨'가 범인인 경우가 많다. 아무리 잘 먹고 잘살게 되고, 소득이 3, 4만 달러가 되도 이런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된다."
"요즘은 '동네 아저씨'가 범인 아닌가"- 직접 '마을 활동'을 해 경험이 있나? "직접 해보지는 않았지만, 국내·외의 전문가 수천 명을 인터뷰하고 수천 군데의 현장을 다녔다. 예컨대 일본의 세타가야, 우리나라의 성미산마을, 충남 홍성의 홍동면, 부산의 반송마을 등등의 현장을 통해 많이 배웠다."
- 현장답사를 한 마을 중에 가족들과 가서 살고 싶은 마을을 꼽는다면."마을은 등수를 매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을마다 자연환경, 인문환경, 역사 등 고유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 헤이온와이(hay-on-wye)가 있는데, 이곳은 헌책이라는 특성을 살려 하나의 왕국을 이뤘다. 독일에는 쇠나우라는 마을이 있다. 원전 반대운동을 했던 곳이다. 지금은 자연생태에너지의 성지로 바뀌었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바꿔낸 곳이다. 이렇게 위기에 처한 마을일수록 더 좋게 바꾸고 꾸밀 수 있다. 서울의 아주 척박한 곳들도 좋은 마을로 재탄생할 수 있다고 본다."
-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곳을 묻는 질문이었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나는 가장 열악하고 힘든 곳에 가서 '요렇게 바꿔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웃음)"
- <오마이뉴스>는 '마을의 귀환' 시리즈를 통해 서울의 여러 마을을 현장취재를 하고 있다. 잘 되는 곳은 오히려 서울시와 엮이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자기들 하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당연하다. 나라도 그렇게 대답할 거다. 풀뿌리 세력들이 잘 이끌던 사업도 관이 개입하면 수동적, 의존적이 되어 점점 흐지부지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비단 마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등 사회 전반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나도 시민사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고 일부의 이런 우려와 경계 어린 시선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가 앞장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행정은 반드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지원'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설계할 때 이러한 점을 최대한 고려했고, 여전히 세심한 부분까지 노력하고 있다. 더욱이 이미 잘 꾸려지고 있는 마을이라면 서울시가 개입할 생각도 없고, 간섭할 이유도 없다.
단, 서울에 마을공동체 문화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한발 앞서 공동체를 이루고 다양한 현장 노하우를 쌓아온 활동가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선배 혹은 동료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마을의 경험을 공유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시의 입장이다."
- 마을공동체 사업을 '박원순식 복지' 정책이라고 생각하나."마을은 우리 삶 한가운데에서 작동하는 삶의 복지, 생활 복지라고 할 수 있다. 돈으로만 복지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복지는 허점도 많다.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해진 시민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사람 간의 관계, 참여를 통해 사회가 채우지 못하는 틈새를 메워갈 수밖에 없다.
내가 아이는 아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격리된 벽을 허물고 온기 가득한 관계망으로 어우러지는 마을공동체에서 새로운 시대 복지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우리는 본래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핏속을 흐르고 있는 이 문화를 잘 살린다면 한국형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핵심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서울은 전세난, 월세 상승으로 정주율이 낮다. 먹고 사는데 바빠 다른 데 신경 쓰기 어려운 저소득층도 많다. 마을에서 안정적으로 살수 있는 여건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맞는 얘기다.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너무 척박하고 피폐해져서 마음도 그렇고 물리적으로도 공동체를 복원한다는 게 어렵다. 이럴 때는 늘 단순하고 쉽게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이사 온 아이가 엘리베이터에 "몇 동, 몇 호에 이사 온 누구예요. 유치원 몇 반에 다녀와 제 동생이름은 누구고요, 앞으로 잘 지내요"라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여기에 '이사 잘왔다', '자주 만나자'는 글이 수십 개가 붙었다. 이런 게 마을 만들기다. 작고 단순한 것에서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 실천은 벽화 그리기를 통해서도 할 수 있고, 마을 게시판으로도 할 수 있다. 헌책방으로도, 장미꽃 한 송이로도 할 수 있다. 서울시가 마을공동체 백날 외쳐도 아무 소용없다. 서울시 국장, 과장에게도 '서울시가 앞장서면 될 일도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일단 한번 붐이 일어나면 삽시간에 되는 나라다. 피상적일 수 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걸 고민하고 있다."
- 박 시장이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마을공동체 사업이 지속될 것이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남은 임기는 1년 8개월, 혹 연임을 한다 해도 6년 남짓이다. "연임하고, 한 번 더 하면 10년이 넘는다. 그러고 물러났다가 한 번 더 하면 14년이다. (웃음) 계속 강조했지만, 그런 문제는 서울시가 마을 공동체 사업을 주도하려고 할 때 벌어질 일이다. 바닥에서부터 운동이 일어나도록 하면 2, 3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다. 마을공동체는 박원순이라는 사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이미 사회 전체가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일본은 마을 만들기를 시작한 지 20년째다. 이제 숲이 우거지고 있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굉장히 늦은 게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금 불을 붙이는 정도다. 없었던 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내가 없어진다고 사라질 일이 아니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아파트에서 마을공동체 가능하냐고? 이미 있는 제도와 기구 잘 활용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