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내 지갑속에 항상 갖고 다니는 아버지 사진. 이젠 보고싶고 그리워도 만날 수 없는 분이다.
박영미
중학교 3학년 무렵(1999년)이다. 그때 당시 내가 살았던 김제시에도 신규 아파트가 대거 들어섰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아파트 계약서'를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이제 이사 갈 일 없이 평생 여기서 살아야겠다"며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당시 아파트 입주 예정일은 3개월 후, 그러나 당시 살던 집은 일주일 후 계약이 만료될 예정이었다.
월세를 더 받고 3개월만 더 살게 해주면 안되겠냐는 아버지의 사정에 주인 내외는 거절로 답했다. 결국 초겨울에 이사를 해야 했던 우리는 임시방편으로 연탄 때는 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3개월만 버티면 된다는 심정으로 추위를 온몸으로 버텼다. 저녁은 말할 것도 없이 한낮에도 추운 그런 집. 길거리에서 바나나빵을 파셨던 아버지의 추위는 집에 와서도 녹지 않았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춥게 만든 겨울이 지나고 봄은 소리소문없이 찾아왔다. 아파트 입주일은 예정보다 더뎌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1교시 무용시간에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내 집 마련을 한 달 남겨 놓고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49재가 끝날 무렵 아파트 입주가 시작됐지만, 우리는 들어갈 수 없었다. 새어머니 곁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 남매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 아파트 계약금도 법적인 분쟁을 통해 우리 지분만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학수고대했던, 새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다는 꿈은 아버지와 함께 모두 떠나갔다.
그리고 찾아온 새로운 가족과 집, 그곳은 된장찌개 냄새 구수하게 진동하는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었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고모집... 아파트보다 더 따뜻했다세상에 둘만 남겨진 남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넨 분은 다름 아닌 고모였다. 일찍이 홀로 돼 두 명의 자녀를 키우고 계셨던 고모는 뼈다귀탕집을 운영하셨다. 변변한 집은 따로 없었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서 함께 생활했다. 고모는 그곳으로 우리 남매를 불러들인 것이다. 방이 너무 좁아 기초생활수급자가 살 수 있는 10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를 얻어줬지만 그곳엔 자주 가지 않았다. 깨끗하고 편리하기론 아파트가 단연 좋겠지만, 따뜻하고 편안하기로는 식당에 딸린 방이 더 좋았다. 다섯 식구가 도란도란 티격태격하는 밥상도 따뜻했고, 좁고 불편했지만 한 이불 속에서 체온을 나누는 잠자리도 따뜻했다. 그리고 고모의 꾸지람과 잔소리도 따뜻하고 또 감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왜 불편한 게 없지 않았겠는가. 10m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 가기가 무서워 밤마다 전쟁을 치렀고, 약간 과장해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와 매일 밤 사투를 벌였다. 게다가 정신적 고통도 컸다. 여자 홀몸으로 자녀 넷을 키워야 했던 고모는 집주인의 횡포를 온몸으로 버텨야 했다.
고모는 총 네 번 정도 식당을 이전했는데, 한 번은 집주인으로부터 전세금 돌려받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을 뻔했다. 사업 실패로 연락 두절된 집주인을 어렵게 찾아 사정사정해 두 번에 걸쳐 전세금을 돌려받기는 했지만.
또 한 번은 한 집주인 아주머니가 "기물 파손을 했다"는 이유를 대며 임의대로 수리비를 제한 일도 있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전세금 2천만 원 중 1980만 원만 돌려줬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난 집주인 아주머니를 만나 재점검을 요청했고, 막무가내로 못 주겠다고 버티는 그녀와 한바탕 큰 싸움을 치렀다. 옥신각신한 끝에 나는 그녀에게 20만 원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나는 세입자의 서러움과 억울함을 처음 느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이후 나는 사전 점검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부동산을 계약할 때는 꼼꼼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이것저것을 확인했다.
예나 지금이나 집 걱정, 예비세입자의 두려움 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