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릉. 경북 경주시 보문동 소재.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이 뿐만이 아니다. 신라에서는 여신의 존재도 인정됐다. 제1대 박혁거세의 왕후인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의 왕후인 운제부인, 충신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공주는 국신(國神)으로 추앙을 받았다. 이렇게 신라에서는 국가적으로 여신을 숭배했다.
남해왕의 누이가 박혁거세의 제사를 주관한 사실이 증명하듯이, 신라에서는 여성 사제의 존재도 인정됐다. 또 두 명의 왕실 여성이 팔월 한가위 때 길쌈 시합을 주관한 사실이나, 여성이 원화제도(화랑제도의 전신)의 수령이었다는 사실 등은, 신라에서 여성의 리더십이 광범위하게 인정됐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신라만 그랬던 게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백제에서는 주몽의 부인인 소서노가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소서노도 일종의 여신으로 승격된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학자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백제의 시조는 온조가 아니라 소서노 여제였다"고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에서도 여왕의 존재가 인정됐을 가능성이 있다.
소서노는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세운 뒤, 두 아들인 비류·온조를 데리고 백제를 건국했다. 그는 백제 건국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분석해보면, 소서노가 백제 초기 12년간 통치자의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백제본기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소서노와 온조의 관계가 나빴고, 소서노가 쿠데타로 해석되는 재앙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소서노가 죽자마자 온조가 도읍을 옮기고 궁궐을 지었다는 점이다.
두 모자의 관계가 나빴다는 점은, 소서노가 죽은 지 4년이 되도록 온조가 어머니의 사당을 짓지 않으면서도 자기 궁궐을 얼른 지은 사실에서 추론된다. 정상적인 모자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소서노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에 불과했다면, 쿠데타 세력이 그를 노릴 이유도 없었고, 그가 죽자마자 온조가 도읍을 옮기고 궁궐을 지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소서노가 백제 초대 임금이었다고 생각하면, 이런 점들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소서노가 죽자마자 온조가 도읍과 궁궐을 신속히 마련한 것은, 온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행위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백제 초기 12년간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점들은 신채호의 말대로 백제에서도 여왕이 인정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설령 백제에서 여왕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신이 인정된 것만큼은 확실하다.
소서노가 현실 대한민국 정치를 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