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 공지영 작가는 이 책에 쌍용자동차의 77일간의 파업과 정리해고로 인해 22명이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를 담았다.
휴머니스트
작가는 엉뚱하게도 '의자놀이'를 떠올렸다고 한다. 사람 수보다 한두 개쯤 적은 의자들을 사이에 두고 흥겹게 돌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서로의 엉덩이를 밀어내며 다퉈야 하는 그 놀이. 왜 하필 '의자놀이'였을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놀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다. 상대를 밀어내야 하고, 그래서 누군가는 떨어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의자놀이'는 규칙을 정하는 사람이 의자의 개수를 멋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한두 개씩 줄여나갈 수도 있지만, 사람 수의 절반으로 뚝 잘라 버리거나 아예 한두 개만을 남겨둔 채 싸움을 붙일 수도 있다. 그만큼 규칙을 정하는 사람과 의자를 차지해야 하는 사람 사이의 권력 관계가 뚜렷하며, 의자의 수가 줄어들수록 살아남기 위한 다툼도 격해질 수밖에 없다. 작가가 쌍용자동차 사태를 들여다 보다 '의자놀이'를 떠올린 이유다. 그리고 "의자를 놓친 자들에게는 죽음을 부르는 그런 미친 놀이"는 그렇게 스물두 명의 목숨을 차례로 앗아갔다.
작가의 손을 잡아 끈 두 명의 죽음 2011년 겨울 어느 날, 작가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하게 된다.
2010년 4월 25일,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노동자(정확히는 무급휴직자) ㅇ씨에게 아내 ㅅ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보고 싶으니 빨리 집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77일간의 파업이 끝나고 무급휴직이 결정된 뒤 약 6개월이 지났을 무렵으로, ㅇ씨는 1년 뒤 복직시켜주겠다던 회사의 약속을 기다리며 일용직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내 ㅅ씨는 적금을 깨고, 보험을 해약하고, 차를 팔고, 아이들 돌 반지와 결혼 때 받은 목걸이까지 팔아가며 생활비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아내도 남편도 그리고 열일곱 열여섯 남매도 점점 말수가 줄어갔다. 남편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가끔 화장실에서 흐느끼기도 했다.
그날 아내 ㅅ씨의 전화를 받은 ㅇ씨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평소처럼 남편을 맞이했고, 남편은 옷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매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그때였다.
"(ㅅ씨는) 무심한 걸음걸이로 베란다로 다가가 문을 열고 그대로 앞으로 나갔다. 그녀의 몸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아 아파트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삶과 죽음 사이, 아무리 평소에 자살을 연습했던 사람이라 해도 한순간쯤은 망설일 그 간격을 그녀는 풀쩍 뛰어넘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에 다른 방이 있었다는 듯 스스럼없는 몸짓이었다. 그래서 아이들도 베란다로 나가는 엄마를 빤히 보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 아이들의 눈앞에서 엄마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의자놀이> 중 그리고 다시 열 달이 지난 이듬해 2월 26일 아침, 남편 ㅇ씨도 딸에게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ㅇ씨가 남긴 통장 잔액은 4만 원, 그리고 한 달 뒤 150만 원의 카드빚 청구서가 고아가 된 두 남매에게 날아왔다.
그런 식으로 무려 스물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9년 4월 8일, 사측이 생산직 노동자의 절반에 달하는 2646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발표하던 날, 벌써 몇 달 전에 강제 휴직을 당한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이 첫 번째 죽음이었다.
그 뒤로 3년이 지난 2012년 3월 30일, 77일간의 파업 현장을 처음부터 함께 지키다 공장 지붕 위로 컨테이너를 타고 내려온 경찰특공대에 의해 끔찍하게 짓밟혔던 서른여섯의 젊은 노동자가 자신이 살던 임대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그것이 스물두 번째 죽음이었다.
대부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몇몇은 심근경색이나 뇌출혈로 돌연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죽음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들 모두는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죽음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져버린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