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청사 유리문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검찰 깃발이 비치고 있다.
유성호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을 가장 극적으로 엿볼 수 있었던 선거는 지난 1997년의 대선이었다. 당시 세간에는 김대중이 '기적의 4단 콤보'를 등에 업고도 겨우 39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이긴 것이 화제였다. 그 '기적의 4단 콤보'란 ▲IMF 사태 ▲이인제 출마 ▲DJP연합 ▲이회창 아들의 병역비리의혹이었다. 이 네 가지 사항 중 하나만 어긋났더라도 아마 이회창 후보가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이것이 상식이고 이것이 '당연한 현실'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 법칙을 작동시키는 배후를 잘 알고 있다. 바로 언론과 국가기관들이다. 종이신문의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조중동'은 만만치 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MB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공을 들여 방송을 장악한 것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 지상파 방송들은 이번 선거 기간 동안 일방적으로 여당에 유리한 보도를 쏟아냈다.
BBK 사건으로 MB 정권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검찰은 지난 4년 내내 야권 인사들 혹은 MB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들만 집중적으로 괴롭혀왔다. 청와대는 아예 직접 불법사찰을 주도하여 김종익씨의 경우처럼 '한 번만이라도 잘못 걸리면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을 손수 가르쳐 주었다.
공평무사한 선거관리를 해야 할 선관위는 '카퍼레이드' 사건에서 억지논리까지 동원해 박근혜 위원장을 옹호하더니 강남을 선거구에서는 기본적인 투표함 관리에서도 허점을 보였다.
정봉주 유죄판결, 보수에겐 총선 위한 '신의 한 수'이런 불공정한 게임의 역사는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친일파가 득세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한국전쟁과 오랜 군사독재를 거치며 너무나 공고해져 나 같은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패배한 이유는 MB의 실정에 따른 심판론에 취해 이런 '당연한 현실'을 너무 만만하게 본 탓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을 극복하려면 ①그 법칙이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든가 아니면 ②아예 그 법칙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지난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는 '하나만 걸려라'하는 상대방의 그물망을 용케도 모두 피하면서 ①을 만족했고,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가 대안언론으로 떠오르며 ②를 추구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연대는 둘 다 하지 못했고, 결과는 패배였다. 돌이켜보면 10·26 재보선을 조기대선레이스와 결부시키며 성공적으로 데뷔한 <나꼼수>가 그 레이스의 반환점에서 결정적인 자책골을 넣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결과를 다 놓고서 다시 복기해 보자면 지난 연말 대법원에서 느닷없이 정봉주에게 유죄판결을 내려 구속 수감시킨 것이, 결과적으로 봤을 때 보수세력에게는 이번 총선을 위한 '신의 한 수'였던 셈이다.
문제는 여전히 불공정한 현실 속에서 대선을 또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안나 카레니나'의 저주를 벗어나려면 그것이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그 법칙 자체를 없애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지금은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10가지라면, 나중에는 그 조건의 가짓수가 100개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저주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제2의 김용민 사태가 전체 선거판을 또 다시 좌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8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야권이 이기려면 ①항을 조심하면서도 ②항에 주력해야만 한다. 부당한 현실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문성근이 민주당의 대표권한대행직을 맡자마자 불법부정선거특위를 설치하고, 방송사 파업현장으로 달려간 것은 그런 맥락에서 대단히 잘한 일이다.
이뿐 아니라 <나꼼수>가 다시 대안언론으로 설 수 있게 해야 함은 물론, 선관위의 지난 10·26 재보선 부정선거의혹과 이번 총선에서의 편파적인 선거관리 및 강남을 투표함 관리 소홀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쉬운 대로 야권연대 140석이면, 18대 국회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지 않은가.
훨씬 더 위력적인 '대선후보' 박근혜